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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08. 2020

어드벤처 지수 폭발

Day 6. 프랑스 깔레 – 긴느

 순례길 동안 우리끼리 지은 용어 중에 ‘어드벤처 지수’라는 것이 있다. 그 날에 얼마나 도전적인 것을 하고 싶은지를 말하는데, 대체로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나는 그 지수가 낮고, 자유로운 영혼인 이삭은 그 지수가 높다. 하루에 어드벤처 지수가 10이라고 치면 이런저런 행동들을 하면서 그 지수를 쓰게 되는데, 순례길을 하는 동안 조금씩 그 폭이 늘어나게 되었다. 오늘은 나의 손톱만 하던 어드벤처 지수가 폭발한 날이었다.


 무릎 회복을 위해 오늘 하루는 좀 더 쉬기로 했다가, 그래도 내일 조금이라도 덜 걷기 위해 늦은 오후에 출발하기로 했다. 아직 무릎이 안 좋기도 해서 버스를 타고 시내를 지난 다음 걸어서 숲 쪽 캠핑장에서 첫 캠핑을 하기로 하고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대중교통은 역시 한국만한 곳이 없음을 절감하며. 버스정류장을 찾을 때도, 버스에서 내릴 때도 헤맸다. 프랑스의 10대 아이들의 하교길에 낀 두 아시아인은, 기사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도시의 외곽 버스정류장에 내릴 때까지 배낭을 끌어안고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첫 캠핑을 준비하기 위해 우선 마트로 갔다.

 순례길에서 마트에 가면 왠지 항상 신이 났는데, 화장실도 사용할 수 있고, 카트가 잠깐이나마 무거운 배낭도 대신 옮겨 주기도 하며, 다 살 수는 없지만 다채로운 음식이 진열되어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기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둘러보긴 했지만 결국 카트에 담은 물건들은 아주 소소했다. 아직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항상 한 끼는 빵과 햄, 과일을 먹던 터라 다른 걸 먹어보고 싶었고, 날이 아직 쌀쌀하니까 라면을 끓여 먹자며 프랑스산 아시아풍의 라면과 생수 2L짜리를 2개 샀다. 간단히 음식을 해먹을 냄비와 휴대용 버너도 가지고 다녔기에 가스를 사려고 마트를 뒤졌다. 프랑스어로만 쓰여 있으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가스로 보이는 것도 하나 사서 한층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숲 속 캠핑장으로 향했다.


 캠핑장으로 가는 길. 날도 흐리고 어둑어둑 해져서 안 그래도 으스스한데, 이상하게도 캠핑장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고요해졌다. 의아하긴 했지만 아직 추우니까 캠핑을 안 오나 보지, 조금 더 걷다 보면 사람들 소리가 들리겠지 하며 계속 걸었다. 캠핑장 문 앞에 도착한 순간 닫혀 있는 나무문과, 꺼져 있는 조명이 이 캠핑장이 꽤 오래전에 문을 닫았음을 말해주었다. 이미 어딘가로 더 가기에는 시간이 늦었고, 늦은 저녁 갈 곳 잃은 어린양 두 마리는 캠핑장 문을 계속 기웃거렸다. 결국 법을 어기는 데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모험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은, 더 이상 헤매며 걷고 싶지 않은 마음에게 빠르게 승기를 넘겨주었고, 내가 먼저 남편에게 울타리를 몰래 넘어가자고 제안했다. 계속 이래도 되는 건가 하긴 했지만 지붕도 있고 텐트 치기에 딱 알맞은 자리도 보이고, 배도 고팠기에 이삭도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칠 수 있는 텐트지만 아직 몸에 익지 않아서 그마저도 한참 동안 헤맸다. 어영부영 텐트를 설치하고는 그래도 따뜻한 라면 국물을 들이켤 생각에 신이 나서 부랴부랴 휴대용 버너와 가스를 꺼냈다.

 바닥에는 바람이 으스스하게 불어 모래가 사르르 쓸려갔다. 그렇지만 지붕도 있고 3면이 나무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자리에 불법 침입한 우리의 텐트는 바닥만 없다 뿐이지 꽤나 아늑했다. 그런데 가스 뚜껑을 열고 버너와 가스 입구를 맞추려는데, 좀처럼 딸깍하는 시원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귀가 안 맞아, 가스가 새기만 하고 불을 피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푸시식 하는 가스 새는 소리와 함께, 라면에 대한 희망도 푸시식 하고 바람이 빠졌다. 초보 캠핑자들에게는 어쨌든 무리였겠지만, 습한 날씨로 나무토막들도 다 젖어서 어떤 방법으로든 불을 피우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 보였다. 라면을 먹겠다고 4kg의 물을 더 배낭에 짊어지고 낑낑 대며 왔는데, 어깨가 축쳐졌다. 불 피우기를 포기하고, 어두운 숲 속에서 텐트 안에 후레시를 켜 놓고서 둘이 앉아 생라면을 까먹었다. 아직 손톱에는 큐빅까지 박힌 웨딩 네일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웨딩 네일, 프랑스의 문 닫은 캠핑장, 라면봉지는 참으로 신박한 조합이었다.

 가스를 골라온 장본인이었던 이삭은 내가 라면을 얼마나 먹고 싶어 했는지를 생각하며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해했다. 정작 나는 조합이 워낙 신박해선지, 오랜만에 먹는 생라면이 맛있어선지, 웨딩 네일한 손으로 생라면 소꼽놀이에만 신나게 집중했다. 

 길을 걷는 동안 24시간 붙어있으면서 약 3개월의 시간이지만 다른 부부가 대략 3년 동안 함께하는 시간만큼 이삭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때문에 싸우기도 다른 신혼부부보다 훨씬 자주 싸웠고, 서운함을 느끼기도 배로 자주 느꼈을 거라 자부한다. 그렇지만 결국 '이 사람과 함께 라면 행복하겠구나.’가 우리 순례길의 결론이었는데,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된 많은 순간들 중 하나가 바로 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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