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 프랑스 긴느 – 릭끄
우리 나름의 자료조사에 따르면, 사람들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보통의 순례자들은 하루에 한 사람당 10유로~30유로 정도의 예산으로 순례길을 걷는다. 가장 많이 참고한 커플 트래킹 블로그에서는 하루에 둘이 합쳐서 20유로 정도로 생활이 가능하다고도 말했다. 우리는 초보자인걸 감안하고, 신혼여행이니까 너무 고생하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하루 예산을 최대 50유로로 잡았다. (그리고 이 날부터 약 일주일 뒤에 우리 가정의 첫 금융위기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때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다.) 우리가 싸운 이유 중 7할은 숙소 때문이었는데, 경제적인 제한이 있다 보니 나는 밥을 제대로 안 먹더라도 적어도 하루 마무리로 샤워를 할 수 있는 숙소를 원하는 한편, 남편은 숙소보다는 밥에 투자하고 싶어 했고, 캠핑장도 아닌 숲 속에서 하는 그야말로 야생의 캠핑을 꺼리기는커녕 오히려 항상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간밤의 캠핑 뒤에 우리는 보다 더 꾀죄죄해졌다. 문을 닫은 캠핑장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빨리 나오려고, 이른 아침에 어제 라면을 끓이려던 물로 세수와 양치만 마치고 출발했다. 그래도 무릎보호대를 하고 다니니까 걷기가 훨씬 나았고, 오늘따라 마주치는 경치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어제에 이어지는 푸르른 풀밭 사이 연갈색 흙길들도, 신비로운 느낌이 나는 하얀 기둥이 높이 뻗어 있는 빽빽한 나무 숲도 발걸음을 보다 힘차게 했다. 어제저녁도 시원치 않게 먹었고 밤에도 푹 잘 수는 없었지만 자연이 풍성한 식사 겸 피로회복제 역할을 해주어서 처음 10km를 빠르게 주파했다.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인 캠핑장이 있는 마을까지 마지막 5km는 슈퍼 신혼부부 놀이를 하며 천천히 걸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면 우어어 하고 메아리가 울리는 들판에서 꽃도 주고받고, 몸 만한 배낭들 덕분에 서있기만 해도 하트 모양이 되는 사진을 찍는 동안, 사람 하나 없이 온 자연이 우리 것이었다. 늦장을 부렸지만 초반에 열심히 걸은 덕분인지 이른 오후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찍 마을에 도착한 겸, 작은 슈퍼에서 맥주를 한 캔씩 사서 길가 벤치에 앉았다. 어제는 야생에서 캠핑을 했으니까 오늘은 샤워도 하고,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맥주를 마시며 이삭이 우리가 그래도 순례자 신분인데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는 걱정을 꺼내 놓았다. 그렇지만 이 여행을 생각할 때 순례길보다는 신혼여행에 밑줄 쫙, 별표도 뿅뿅 붙여 놓았던 나는 몰디브 풀빌라에서 비키니 입고 노는 것에 비하면 샤워와 침대를 바라는 것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내 마음은 이렇듯 당당했지만 돈을 아껴 쓰자는 공익광고 급의 자명한 메시지를 들고 주장하는 신랑 앞에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새댁이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내 입꼬리는 점점 내려갔다. 전화였으면 진작에 끊었고, 카톡이었으면 예전에 씹었을 텐데 피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난감했다. 마침 아침부터 열심히 걸은 뒤에 마신 맥주 한 캔이 졸음을 솔솔 불러주기에, 대뜸 길가에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낮잠을 청했다. 아무 데서나 잘 자는 타입도 아니면서 그러고 있자니 당연히 잠은 안 오고, 옆에서 멀뚱히 앉아있는 남편 발등만 힐끔거렸다. 불편한 자세로 자는 척하는 것은 10분이 최대였고, 결국 단잠을 잔 척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내 딴에는 꽁한 기분을 낮잠으로 감춰보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눈치 빠르고 섬세한 이삭이 그걸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이른 오후,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는 연 가게도 별로 없었고, 사람도 많지 않은 길을 캠핑장까지 단 둘이 걷자니 숨이 막히도록 어색했다.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작은 빵집을 발견했다. 이삭은 내 손을 끌더니 빵집으로 들어가 내 손보다도 작은데 1.7유로나 하는, 우리 기준에서는 사치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디저트 에클레어를 사 왔다. “We can make it! 우리 잘할 수 있어!”라고 조용히 속삭이고 에클레어를 건네는데, 민망해서 입이 안 열렸다.
"단 걸 먹으면 힘이 날 거야!"
한마디 던지며 밝게 웃는 이삭의 모습에 못 이기는 척 한입 베어 물고는 눈물이 고였다. 나그네의 겉옷을 누가 빨리 벗길 수 있는지를 내기했던 해와 바람 이야기의 햇살처럼, 이삭의 따뜻하고 밝은 미소는 크고 작은 어려움에 내면으로 들어가 버리려고 하는 나를 꺼내 준다. 큰 일도 아닌 일에 토라져 있던 유치한 내 모습에도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모습에 감동에 젖어 있는데, 이삭은 이내 에클레어가 너무 맛있어서 우냐며 낄낄대고 놀리기 시작했다. 눈물 고인 눈으로 이삭의 등을 때렸지만, 숨 막히는 어색함은 사라졌고 남은 발걸음은 가벼웠다.
막상 캠핑장에 도착해보니 텐트를 칠 수 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나무로 지은 작은 오두막들과 대여할 수 있는 카라반들도 보였다. 카운터로 보이는 오두막에 앉아서 주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데, 오두막에서 자는 비용이 70유로, 텐트를 치고 자는 비용 10유로라고 적혀 있는 분필 표지판이 보였다. 70유로면 아직 저녁도 먹지 못했는데, 그 비용만으로도 이미 예산을 한참 넘어 오늘도 자연스럽게 침대를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그렇지만 보통 순례자 할인이 있다는 데에 희망을 걸고 주인아저씨를 만났다. 평일이라 손님이 없었던 건지, 아저씨가 먼저 30유로에 오두막에서 자게 해 주겠다고 제안하셨다. 그 비용도 우리에겐 작은 비용은 아니었지만, 텐트에서 구겨져서 잔 어젯밤을 보상도 할 겸, 숙소 문제로 티격태격했던 부부싸움도 무마할 겸 오늘 밤은 호사스럽게 오두막에서 자기로 했다.
순례길을 시작하며 처음 트래킹 장비를 샀던 지라 배낭, 신발, 재킷, 심지어 양말까지 같이 사서, 어쩌다 보니 촌스럽게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커플룩으로 다녔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이 얘네 옷이 다 똑같다며 귀여워라 할 때마다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그렇지만 그 날 오두막 바깥 벽에 나란히 기대어 있는, 흙이 잔뜩 묻어 있는 똑 닮은 두 켤레의 신발을 보고 있자니 이삭과 부부라는 게 더 느껴져 입가에는 계속 미소가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