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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Mar 13. 2021

당신의 냉장고

 선의 냉장고는 음식이 가득하다. 그냥 가득한 것이 아니라, 냉장고 문이 단추로 잠그는 것이었다면 단추가 터질 듯이 꽉 차있다. 열 명이 함께 식사할 때부터 오롯이 부부만 따로 떨어져 사는 지금까지 그녀는 코스트코에서 장을 본다. 대용량을 싸게 파는 것이 컨셉인 코스트코의 식재료는 부부에게 항상 남지만, 부족한 것을 싫어하는 그녀는 코스트코가 편하다. 식구는 열에서 둘로 줄었지만 두 개의 냉장고를 하나로 줄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삶에는 잦은 이사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냉장고 속 음식을 함께 옮겼다. 각종 소스들은 그렇게 함께 이사를 하며 늘 문 쪽 선반을 지켰다. 스리차차소스, 레몬즙, 수입 버터… 부부는 환갑을 바라보지만 오랜 이민 생활로 이국적인 음식을 하는 것도 먹는 것도 익숙하다. 가지런하고 보기 좋은 글씨로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칸에는 영양제들이 가득하다. 선은 왜인지 건강에 아주 민감하다. 평소 책을 많이 읽지 않음에도 민간요법에 관한 책이라면 밑줄도 긋고 포스트잇도 붙여가며 빠른 시간에 완독한다. 가지런한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선의 며느리인 리나는 젊은 선이 책상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상황이 허락해서 책상에 앉아있을 수만 있었다면, 아마 선은 공부를 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쁜 글씨로 필기노트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김장김치를 나누듯이 말이다. 


 경의 냉장고에는 그녀의 시댁과의 동거생활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냉동실을 빈틈없이 채운 비닐봉지들 안에는 들깻가루부터 감자전분, 얼려놓은 데친 시래기들이 가득하다. 분명히 강박적이다시피 깔끔한 걸 좋아하는 그녀의 작품은 아니었다. 틈이 날 때마다 각을 맞춰 정리해보지만 쌓여만 가고 먹히지는 않는 시어머니의 음식들을 보며 경은 종종 가슴이 답답해진다. 경의 시어머니, 순은 순 나름대로 경제력 없는 남편과 살며 사남매를 키워야 했으니 쉽게 음식을 버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순은 지금 꽤나 큰 대형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남부럽지 않게 버는 아들과 며느리를 두었지만, 아파트 단지 앞 모과나무에서 떨어지는 모과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산책 갔다 오는 길마다, 성당을 다녀오는 길마다 모과들을 주워다 항아리 모양 플라스틱 통에 꾹꾹 채워 넣는다. 이제 그만 좀 주워오라는 손녀의 타박에도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다 하며 시멘트 바닥에 깨지고 터져 모두가 지나치는 모과를 가져다 열심히 씻고 칼질을 한다. 순은 그렇게 끊임없이 냉장고를 채우고 경은 소리 없이 냉장고를 비운다. 


 경의 딸인 리나의 냉동실에는 비닐에 담긴 갈비탕, 소분해서 얼려둔 간장게장이 가득하다. 경이 보내준 음식들이다. 경은 데우기만 하면 되는 맛있는 음식 완제품을 발견할 때면 꼭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리나가 사양할 때면 그녀는 요리 솜씨가 없는 자신을 괜히 나무라며 친정엄마의 도리라고 주장했다. 경은 자기가 친정엄마의 따뜻한 사랑을 맛보지 못했음에도 따뜻한 친정엄마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리나는 대용량의 간장게장을 두고 먹다 온가족이 화장실을 들락거렸던 일에 대해서 경에게 말하지 않았다. 김치냉장고 칸에는 선의 김치가 자리 잡고 있다. 선은 둘째 며느리인 리나를 예뻐했다. 다른 이유보다는 선의 입맛과 비슷한 리나의 식성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미국에서의 삶이 더 긴 자식들과 남편은 한식보다는 양식을 좋아했고, 선은 가끔 홀로 라면을 끓여 김치와 먹었다. 가족들이 먹지도 않는데 너무 많이 한다고 타박했던 선의 김장김치를 리나는 반겼다. 11월에 선이 담근 김장김치를 리나는 이듬해 여름이 되기 전에 다 먹었다. 


 리나의 냉장고는 항상 헐렁헐렁하다. 가득하게 쟁여두는 것보다 먹을 만큼 사서 다 먹어버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경을 닮았다. 경은 자신의 냉장고를 성격대로 할 수 없었지만 리나는 그렇게 했다. 그렇지만 냉장실의 음식들은 각을 맞추지 못하고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다듬지 않은 대파 한 단과 스티로폼 채로 들어있는 얼마 안 남은 딸기… 경이 봤다면 혀를 찼을 광경이었다. 귀퉁이에 놓인 자그마한 글라스락에 담긴 이유식이 정리되지 않은 엄마의 냉장고를 애써 변명했다.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첫째와, 이제 막 첫니가 난 둘째를 키우는 리나는 벅찬 일상을 살고 있다. 리나는 이십대에 첫 아이를 낳았기에 아직 미혼인 친구들이 많았다. 아마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와 보풀이 잔뜩 일어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봤다면, 친구들의 모습과 비교하며 우울감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리나는 요즘 불행인지 다행인지 거울을 볼 새가 없다. 한 칸에는 커피가 가득하다. 아이들이 새벽부터 깬 날이나, 둘째의 이앓이로 밤잠을 설친 날이면 리나는 커피를 권장량 이상으로 들이켰다. 카페인으로 쓰려진 위장은 경의 갈비탕으로 달랬다. 그렇게 리나는 종종 일상이 고단할 때면 냉장고 문을 열어 선과 경에게로 갔다. 가서 갈비탕이며 간장게장이며 김치로 위로를 받고 리나는 다시 집으로 와 행복하지만 지난한 일상을 살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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