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에는 뺨 맞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 뺨 맞는 것을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평범한 삶에선 목격하기 어려운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지난 3월 27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드라마틱한 그 일이 벌어졌다.
시상자로 무대에 선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을 조롱거리로 삼자 스미스가 록의 뺨을 때린 것. 제이다가 탈모증 때문에 삭발을 했는데, 록이 이 모습을 영화 속 삭발한 여주인공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국룰(국민 룰)이 존재하는 한국에서는 찬반 여론이 팽팽하다. '그래도 뺨은 때리면 안 됐다'는 반응과 '뺨 때릴 만했다'는 반응이 고르게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미국배우방송인조합(SAG-AFTRA)은 "스미스 사건은 용납할 수 없다"는 성명을 냈고, 아카데미 이사회도 회의를 열어 징계 절차에 돌입했으며, 윌 스미스도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자진 반납했다.
뺨 한 대의 후폭풍은 (아마도 윌 스미스의) 생각보다 커지고 있다. 윌 스미스의 개봉 예정 및 출연 예정이었던 작품들에서 스미스를 손절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기에 "어떤 형태의 폭력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아카데미의 단호한 공식 입장과 영화계의 엄격한 반응은 쉽게 수긍이 된다.
그러나 한편, 많은 이들이 윌의 분노에 공감하는 건 이해의 차원과 시비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크리스 록의 무례함도 쉽게 용납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내 주변, 아슬아슬 선 넘는 빌런들
'으아아!! 그때 그렇게 바보같이 있었으면 안 됐는데.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사회 초년생 시절,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수시로 벽을 찼다. 외모 평가나 지극히 사적인 질문들 또는 막말을 서슴없이 남발하는 몇 명의 빌런들이 생각나 그때의 불쾌한 감정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그럴 때면 다음에 이런 상황이 또 벌어지면 어떻게 대처해야겠다는 것들을 준비하곤 했다.
누구나 주변에 선을 넘는 무례한 이들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또는 내가 그 장본인 일 수도 있다). 이러한 빌런은 상대와 주변인들, 또는 특정인에게 불편한 모먼트를 선사한다.
조금 더 예민하게 들여다보자면, 본인의 외모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다른 동료들의 외모를 나노 단위로 평가하는 사람, 상대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지나치게 궁금해 하는 사람 말이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 빌런들에게 영화 <달콤한 인생>의 명대사
빌런이 없는 청정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도 미디어를 통해 선 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누군가의 외모를 깎아내리거나 약자를 희롱하며 웃음을 유도할 때가 많다. 아카데미에서 크리스 록이 제이다의 삭발을 농담 소재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사실 지금껏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아픔과 콤플렉스를 웃음 소재로 삼으며 웃어왔다. 장애인을 흉내내거나, 외모를 비하하거나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써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인권의식 향상으로 사회적으로 불편함에 대한 인지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웃음이 무엇을 향했는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많은 개그들이 누군가의 고충을 웃음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 나오고 착한 개그가 주목받게 된 배경이다.
무지가 폭력이 되지 않도록
선 넘는 모든 무례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불쾌감을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른다고 무례함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어떤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 조롱이고 무례함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을 넘는 기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풍자와,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조롱을 구분했다. 풍자와 조롱, 둘은 자주 혼동되지만 '대상이 강자인가 약자인가' 그리고 '대상의 속성이 선택인가 조건인가'에 따라 나뉜다고 그는 설명한다.
윌 스미스 사건을 두고 몇몇은 윌 스미스 가족이 약자는 아니기 때문에 저 정도 농담은 괜찮다고 하지만, 신형철은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로 변하지 않는다.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제이다의 탈모증과 같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조건/특성은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외모와 성별, 인종, 장애, 죽어가는 사람과 죽음 자체가 웃음거리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주변에 선을 넘는 무례한 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농담을 하는지 떠올려 보자. 만약 그가 조롱을 농담으로 착각한다면 알려주자. 해도 되는 조롱은 없으며, 조롱으로 느끼는 쾌감은 저급한 쾌감이라고 말이다.
무례함에 나를 지키는 방법
사회생활과 대인관계를 망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을 넘는 빌런들 중에서도, 그 무례함을 의도했다기보다는 사회성이나 소셜 스킬이 부족한 케이스도 있을 것이다. 대개 말로써 무례해지는 경우는 소위 '티키타카'에 실패한 경우다.
김수현 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상대는 내게 공을 던지는데 나는 조금도 받아치지 못하면, 그때부턴 놀이가 아닌 폭력이 되고, 상대는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가해자가 되어 버린다." 의도와는 상관없다. 내가 무례함을 느꼈다면, 내가 불쾌함을 느꼈다면 상대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이해 못 할 빌런들이 존재한다. 상대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 일부러 모욕을 하고 비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을까? 크리스 록의 무례한 발언에 윌 스미스는 어떻게 반응을 했어야 할까?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펜싱 금메달리스트인 나희도를 이긴 상대 선수가 모욕을 준 장면에서 나희도가 대처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나희도 별거 없네? 우연히 금메달 하나 딴 거 가지고 방송 나오고 쇼를 다 하더니"라고 말한 상대를 향해 나희도는 흥분하지 않고 말한다.
"너한테 졌으니까 할 말 없고. 아까 시합할 때 네가 내 수를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데. 역시 그랬구나. 말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회성 좀 챙기고. 우리 이제 어른이다. 시합 잘해."
윌 스미스가 폭력을 행사한 것은 명확히 잘못이다. 그리고 그는 감정적으로 흥분했기 때문에 진 것이다. 그가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감정적 대응을 한 것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희도 선수처럼 감정을 누르고 상대의 무례함을 지적함으로써 오히려 크리스 록을 무안하게 만들었다면, 스스로 교양이 있다고 믿는 할리우드 사람들은 나서서 크리스 록의 선 넘은 농담을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대인관계 기술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들을 알려준다. 상대가 무례하게 나온다면 그것에 말려 흥분하지 말라고. 그리고 상대가 선을 넘었음을 분명히 알려주라고 말이다.
만약 의도하지 않은 무례함이었다면 상대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사과를 할 것이고, 의도된 무례함이었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그의 무례함을 알리는 기회가 되고, 나 역시 기분 나쁘다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가해자에게 불필요한 감정소비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건 좀 선을 넘는 발언 같네요", "상처받았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위험한 발언인 것 같습니다." 다음부터는 선을 넘는 무례한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이처럼 상대의 선 넘음을 경고해주자.
무례함에 무례함으로 대응하면 윌 스미스처럼 오히려 사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