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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Apr 26. 2021

엄마의 재발견


내가 쿠바에 있을 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평생을 농사를 지으셨던 외할머니는 꽤나 부자셨다.


바로 자식 부자!


외할머니는 여섯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두셨. 하지만 안타깝게도 큰 아들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외할머니보다 훠얼씬 먼저 세상을 떠나버려서 아들이 하나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자식이 일곱이니까 여전히 외할머니는 자식 부자셨다.


그런 외할머니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코로나가 시작된 작년에는 외할머니 제사를 둘째 외삼촌이 혼자서 지내셨다고 했다. 그런데 올해는 효녀 이모들이 시골에 있는 큰 외숙모 댁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기로 하셨다며 나에게도 꼭 참석할 것을 부탁하셨다. 한국에 돌아와서 아직까지 이모들을 못 만난 지라 너무 보고 싶다고 엄마랑 꼭 함께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신 것이었다.


나의 엄마는 여섯 명의 딸들 중에서 넘버 투이시다. 

위로 언니가 한 분 계시고 나머지는 모두 동생들이다. 내가 어릴 적에 4, 5, 6번 이모들과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특히 간호사였던 막내 이모는 결혼하기 전에 우리 집에서 한동안 살아서 꽤나 친했었다. 그래서인지 막내 이모는 내가 쿠바에 있을 때에도 한 번씩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주었고 막내 이모의 이쁜  딸들(나의 외사촌 동생들)도 나를 몹시 잘 따른다.






경상북도 봉화군 산골짝에 위치한 외갓집은 나에게 너무나도 머나먼 존재였다. 어릴 적 나와 오빠들은 친할머니 댁에는 명절 때마다 갔었는데 외갓집에는 거의 가 본 기억이 없다. 아빠가 장남이시고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셨던 터라 명절에 감히 친정에 간다는 건 당시 엄마에게는 꿈같은 일이었을 테다.


내가 외갓집에 처음 간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마도 여름 방학 때였던 것 같다. 또래의 이종사촌들과 함께 머나먼 외갓집에 가게 되었다. 그때는 교통이 지금처럼 편리하지 않았던 때라 봉화 시골 안까지 들어가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처음 가보는 외갓집이라 그곳은 어떤 곳일까, 하는 기대감으로 몹시 설레었다.


당시 나는 외할머니가 천사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자주 티격태격했던 엄마와는 달리 외할머니는 늘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끔 엄마에게 외할머니가 정말 엄마의 엄마가 맞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전혀 개발이 되지 않았던 산골에 가니 공기도 물도 모두 맑았다. 우리는 이종사촌 언니들을 따라 강가로 가서 물놀이를 했다. 고디(다슬기)도 잡고 물고기들도 보았다. 몇 시간을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외갓집으로 다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맛난 것을 먹었다.

지금도 시골 산골의 물은 이렇게나 맑았다

시골에는 밤이 일찍 오는지 도시보다 빨리 어두워지는 듯했다. 그런데 이모들 중 누구도 불을 켜지 않았다. 대신 초에 불을 붙였다.


이상하다 오늘 제삿날인가? 엄마가 그런 얘기 안 하셨는데 왜 다들 촛불을 켜는 거지?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사 음식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촛불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어둠이 깔리자 모두들 초에 불을 밝힌 것이었다. 깜짝 놀라버렸다.


뭐라고? 전기가 안 들어온다고?


그 충격에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방문했던 외갓집을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아주 강력한 한방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문이었다. 큰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외숙모 혼자서 억척같이 일을 하시며 자식 둘을 잘 키워내셨고 땅도 넓히셨고 집도 새로 지으셨다고 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번에 외숙모를 보니 완전 여장부셨다. 혼자서 농사를 지으시고 일꾼들을 데리고 일을 하시다 보니 트럭을 고 다니시는데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다.


엄마는 큰 이모와 3번 이모 그리고 외삼촌과 함께 오신다고 하셨고 나는 4,5,6번 이모들과 함께 새벽에 외갓집으로 떠났다. 대전에 사는 4번 이모는 전날 대구에 도착해서 막내 이모네서 하룻밤을 주무신 후 우리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이모들이 나를 보더니 말씀하셨다.


엄마야, 린다 맞나? 니 와이래 젊어졌노? 결혼식 때보다 더 젊어졌네.


언니야 맞제 맞제, 야 와이래 젊어졌노. 분명히 옛날에는 잔주름이 있었는데 이제 없네.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모들은 몹시 진지했다. 세 명의 이모들 모두 입 모아 같은 말을 하며 그 비법을 물어보았다. 이모들의 말이 모두 사실은 아니었지만 일부는 맞는듯하여 한번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그 비법이 뭘까?


혹시 천연 오일?


한국에 와서 자가 격리할 때 유튜브를 보면서 공부를 한 후 대구 본가에 와서 매일 빠짐없이 유기농 화장품과 함께 사용했던 천연 오일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유기농 화장품인 지오가닉의 스킨, 에센스 그리고 미백크림에 섞어서 사용을 한 천연 오일 덕분에 피부가 맑아진 것이었다. 물론 화장품 자체도 훌륭하기도 했다.


 이모들에게 내가 사용을 하는 천연 오일에 대해서 그리고 각각의 오일이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는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한번 듣는다고 기억을 할 수는 없는지라 결국 단톡방을 만들어 이모들이 버튼만 누르면 살 수 있도록 모든 정보를 공유했다. 천연 오일뿐만 아니라 불면증이 있는 이모에게는 엄마께 사드린 불면증 제품도 알려드렸다.


https://brunch.co.kr/@lindacrelo/145


외갓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모들과 나는 이런 정보뿐만 아니라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세 명의 이모들과 나 이렇게 넷이서만 이야기를 한 적은 처음이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의 엄마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젊은 시절의 내 엄마 이야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언니 결혼식 때 기억난다...


막내 이모가 엄마 아빠의 결혼식날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언니가 회사 다닐 때 너네 아빠 만났잖아. 언니가 형부 뒷바라지 많이 했데이.


4번 이모의 말에 내가 깜짝 놀라며, 뭐 우리 엄마가 회사를 다녔다고? 라며 물어보았다. 그 말에 이모들이 더 놀라며 그렇다고 했다.


린다야, 너거 엄마처럼 많이 베풀고 잘해주는 사람 잘 없데이.


세 이모 모두 나의 엄마가 가장 좋은 언니라고 하며 형제들 사이에서도 엄마가 얼마나 다른 형제들에게 많이 베풀었는지에 대해서 여러 일화들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나랑 큰오빠가 엄마를 닮았다고, 그래서 이모들이 큰오빠와 나를 각별히 더 좋아한다고 하였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음식을 하셔도 한 솥을 하셔서 온 동네 사람들에게 다 퍼주셨고 무언가가 있으면 늘 다른 분들에게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그래서 엄마가 베푸시는 분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베푸시고 사셨다는 걸 이모들을 통해서 새로이 알게 되었다. 덕분에 자식인 우리들도 엄마가 많이 베푸신 혜택을 받고 있으며 그런 엄마를 닮아 우리도 베푸는 데 익숙해져 있긴 하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나의 엄마가 되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아빠랑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결혼식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젊은 시절 때 아빠가 엄마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이라 이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엄청 놀라게 되었. 그리고 동시에 마음이 너무 짠해왔다.


엄마가 그리도 힘든 삶을 사셨다니...


어릴 적에 엄마가 나에게 잘못한 일을 가지고 엄마와 자주 다투었고 나는 아빠 딸이라고 하면서 엄마를 한 번씩 서운하게 했는데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까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엄마도 나와 같은 여자인데 하나뿐인 딸인 나는 여자로서의 엄마 이야기를 엄마 편에서 진지하게 들어주고 또 공감해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가 젊은 시절 때 아빠에게 당한(?) 억울한 이야기를 하시면 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나는 철저히 아빠 편을 들었다.


내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


이모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엄마가 다르게 다가왔다. 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힘들게 살아가는 엄마의 고통을 조금은  것 같았다. 그동안은 그런 엄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해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같은 여자로서 마음이 너무 짠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교에 가기 전까지 엄마와 아빠는 자식들 앞에서 한 번도 싸우신 적이 없으셨다. 그런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자식들을 위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엄마가 다 참으셨다는 것을. 아빠 딸인 만큼 아빠를 많이 사랑하고 또 나에게는 좋은 아빠지만 엄마에게 아빠는 좋은 남편, 다정한 남편이 아니셨다. 아마 내가 엄마였다면 나의 아빠 같은 남자와 살 수 있었을까?


엄마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모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같은 여자로서 엄마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엄마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하려고 노력을 하는 걸 보니 확실이 이모들의 이야기가 충격적이긴 한 듯했다.


젊은 시절 엄마가 겪은 고된 시집살이와 아빠에게서 받은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의 가슴 깊숙한 곳에 '한'이라는 이름으로 꼿꼿이 자리를 잡고 있어 쉽사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는 힘드실 테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엄마가 그 한에서 벗어나서 조금이라도 더  젊으실 때 엄마의 인생을 즐기셨으면 하는 것이다.


친구들이랑 맛난 것도 드시고 여행도 다니시면서 매일매일 웃으시고 잠도 잘 주무셨으면 좋겠다. 엄마가 많이 웃으시고 행복하셔야 내가 덜 미안할 것 같아서, 어쩌면 이것도 나를 위한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엄마에게 가장 미안하고 가슴이 아픈 건, 엄마는 나처럼 한 남자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본 적이 없으셨다는 거다. 20대 초반에 제대로 연애도 못해보고 아빠한테 시집와서 평생을 아빠랑 사셨는데 효자셨던 아빠는 그런 엄마를 사랑으로 감싸주지 않으셨다.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인 엄마도 드라마에서나 현실 속에서 남자에게 듬뿍 사랑을 받는 여자를 보면 얼마나 부러웠을까? 엄마가 나에게 한 번씩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니는 좋겠다. 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니 가고 싶은데 다 가봐서. 나는 겁이 많아서 하라 캐도 못하는데. 내가 지금 후회되는  운전을 안 배운 거다. 너거 아빠가 운전 못 배우게 해서 운전을 안 배웠는데 운전이라도 할 줄 알면 답답할 때 혼자 차 몰고 나갈 텐데... 난 그게 젤 아쉽다.


하... 그런데 나도 운전을 못한다. 24년 전에 운전면허를 취득했지만 그것도 1종 보통으로, 차에 대한 트라우마로(죽을 뻔했다) 운전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멋지게 엄마를 태우고 둘이서 훌쩍 떠나지도 못한다. 나도 이 점이 너무 아쉽다. 대신 몇 년만 있으면 자율주행 차가 많아질 테니 그때 차를 렌트해서 엄마가 가시고 싶은 데 같이 갈 수 있으려나.


언젠가 엄마 사주를 본 적이 있는데 '골골 백세'라고 했다. 아픈 데는 많아도 오래 사신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오래 사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사주가 다 맞는 건 아니지만 내가 믿고 싶은 걸 믿는 건 내 맘이니까. 엄마가 오래오래 살아서 자율주행 자동차로 꼭 함께 여행해보길 기도해야지. 그리고 오늘 엄마에게 좋은 말,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 주어야지. 엄마가 조금이라도 기분 좋으실 수 있게.


여자로서 엄마의 삶은 많이 힘드셨지만 나의 엄마로서의 삶은 조금이나마 보람되실 수 있도록 내가 잘 되어서 효도를 더 많이 드려야지. 그래야 엄마에 대한 안쓰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만회가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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