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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하다'가 표준어라고?

동사의 맛

by 쿠바댁 린다


동사는 음식으로 치면 육수나 양념에 해당한다. 제 몸을 풀어헤쳐 문장 전체에 스며들어서 글맛을 내기 때문이다. 육수나 양념과 마찬가지로 잘 쓰면 감칠맛까지 맬 수 있지만 잘못 쓰면 맛은커녕 허기를 채우기도 어려워진다.


출판사와 퇴고한 글을 주고받으며 나의 문장력과 문법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알게 되어 다른 책을 사면서 김정선 작가의 <동사의 맛>이라는 책도 함께 주문을 했다. 글을 쓰면서 늘 동사에 한계를 느꼈던지라 제목을 보고 고른 것이다. 뭐 내 글의 한계가 동사뿐이랴! 접속사도 명사도 부사도 글을 쓸 때마다 부딪히는 문제지만 모든 문장의 기본은 주어와 동사이니 동사부터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게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나 한국인인데.. 였다.


책을 읽는데 내가 모르는 동사가 반이 넘었으니 이런 생각이 들만도 하다. 볼펜 하나, 형광펜 하나 그리고 포스트잇을 옆에 두고는 책을 읽는 내내 열심히 줄을 긋고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고 포스트잇을 붙여대었다. 다 읽고 보니 거의 물 반 고기반처럼 책 내용의 반에나 줄이 그여 있었다.



국어를 다시 배워야 하나?



가방끈이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다. 게다가 국어 실력이 떨어진다고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으로 하여금 나의 국어 실력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참 재미있다. 남녀의 이야기로 글을 이끌어내면서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예시를 풀어놓아 모르는 동사는 많았지만 흥미로웠다. 게다가 읽으면서 동사가 이렇게나 맛난 거였나?라는 생각부터 해서 한글의 묘미에까지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어제 하루 만에 책을 끝내고 싶었는데 힘든 운동을 해서인지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져서 아주 이른 시간에 잠이 들어 그럴 수가 없었다. 일찍 잔 덕분에 새벽 3시에 다시 일어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2시간이 지나자 또 잠이 와서 자고는 3시간 후에 일어나서 남은 부분을 다 읽고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모르는 동사가 너무 많이 나오자, 나만 이런 게 아니겠지? 다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하겠지?라는 물귀신 같은 생각도 들었고, 표준어보다 비속어나 은어가 갈수록 난무하는 시대라 어린 친구들은 이 책을 읽으면 기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나는 꾸밈이나 기교가 많은 글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솔직하고 담백한 글을 좋아하는데 이 책이 그렇다. 동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라 딱딱할 수도 있는데 글이 아주 담백하고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국어가 이토록 아름답다니!



나이 탓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한국말이 좋아진다. 어릴 적에는 외국어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고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워서 결국 외국어를 공부했는데, 이제는 한국어가 좋아서 한국어로 글을 쓰고 한국말을 하는 게 좋으니 역시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이 책에 눈길이라도 주었을까?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려고 하다 보니 글에 세심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덕분에 그토록 싫어하는 문법에 관한 책을 읽게 된 것이다. 한국어든 외국어든 말하는 건 좋아했지만 문법은 싫어했던 나였는데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부족함에 끊임없이 놀랬지만 그중에서 가장 놀란 게 바로 209쪽에 나오는 개소리 하다/개지랄하다 였다.


'개소리하다'는 개처럼 짖는 소리를 낸다는 뜻이 아니라, 조리도 없는 말을 허투루 지껄인다는 뜻이다. 개소리의 '개'는 '참되지 못하고 함부로 된 것'을 뜻하는 접두어이다. 반대말은 '참'이어서 참살구, 개살구와 같이 나누어 쓰기도 하지만 '참'은 생략할 때가 많다.
개소리뿐만 아니라 개자식 또한 강아지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막돼먹은 녀석이라는 뜻이고, 개꿈, 개떡, 개죽음, 개망신도 다르지 않다.
물론 동물을 뜻하는 '개'가 붙을 때도 있다. 개지랄은 개가 떠는 지랄이고, 개차반은 개가 먹는 차반, 곧 똥을 말한다. 예전엔 개들을 풀어 키운 데가 사료랄 것도 없어 사람이 먹다 남긴 밥찌끼나 제가 눈 똥을 먹기도 했으니까.
그럼 개거품의 개는? 개꿈의 개도 아니고 개차반의 개도 아니다. 게거품을 잘못 쓴 것이니까. 입에 보글보글 거품을 무는 게에 빗대서 몹시 괴롭거나 흥분한 모습을 게거품을 문다고 표현한 것이다.


'개소리하다'가 표준어라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나는 당연히 이건 욕이니까 비속어라고 생각했는데 표준어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표준어라는 걸 알았으니 '개소리하다'나 '개지랄하다'를 편히 써도 되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지. 이건 욕이 아니야, 표준어야 라고. 훗.


그리고 설레이는 부분도 있었다.


대학 시절 후배 시골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후배가 할머니에게 나를 소개하자 할머니는 "선배님이라고? 아니 그럼 뭐하고 있는 게야. 어서 다락에서 사과 한 알 꺼내 벗겨 드리잖고." 하고 손자를 채근했다. 사과를 벗긴다는 말이 묘하게 들려서 밤새 후배와 나란히 누워서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할머니의 그 말만 내내 생각했다. 그날 이후 내게 사과는 가장 에로틱한 과일이 되었다.


할머니의 한마디 말씀에 사과가 가장 에로틱한 과일이 되었다니! 게다가 그 말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내내 생각을 했다니! 작가의 마음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설레며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하나하나의 단어에 애정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교정의 숙수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은 한 번만 읽어서는 별 효과가 없을 듯하다. 적어도 머릿속에 지우개가 든 나에게는. 아마 열 번을 읽고 필사를 하더라도 이 책에 나오는 동사는 계속 헷갈리겠지만 그래도 계속 읽으면서 노력을 하다 보면 나의 어휘가 조금은 늘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각종 인공지능들이 고쳐주는 맞춤법의 수가 줄어들지는 않을까?(인공지능도 틀릴 때가 있지만) 이 글을 쓰면서도 책의 목차를 보고는 헷갈리는 동사를 찾아서 고쳤으니.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의 다른 책인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김정선 작가님이 몹시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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