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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를 읽고 희망을 가지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by 쿠바댁 린다


"린다야, 내 요즘 책 읽는다. 박완서 책부터 읽는데 내가 지금 읽는 게 70대에 쓴 첫사랑에 대한 책이야. 70대에 사랑에 대해서 쓴다는 게 난 너무 멋지더라. 나도 그 나이가 되어서 상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있으면 좋겠어..."


친구의 말에 나도 동의는 했지만 박완서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나는 그게 어떤 책인지, 그녀의 감성이 어떤 건지 알지 못했다. 내가 박완서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그저 한국 문학계에서 아주 유명하신 분이라는 것뿐이었다. 이름은 들어봤으니 말이다.


순간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출간 계약했다고 온 동네에 자랑해놓고선, 박완서 책 한 권 안 읽어본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 박완서뿐이겠는가. 문학책이라고는 별로 읽어본 게 없다 보니 사람들이 문학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듣기만 할 뿐 말을 할 수가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내가 읽어 본 게 뭐더라? 한때 좋아했던 이외수 소설이 좀 있구나, 그리고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풀꽃도 꽃이다, 공지영 책 몇 권, 김진명, 이문열... 고작해야 그 정도였다. 그리고 그 책들은 모두 읽은 지가 꽤나 된 것들이고 소설이니까 그저 재미로 읽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박완서를 읽기 시작했다며 그녀의 책들을 하나씩 다 읽어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린다야, 박완서도 나이 마흔에 글쓰기 시작했다더라. 니보다는 일찍 시작했지만 그래도 너도 희망이 있어."


"정말? 늦게 시작하셨구나... 나도 열심히 써 봐야겠네. 하하하"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내 맘은 이미 작가 박완서에 대한 궁금증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읽을 책이 쌓여있었지만 박완서를 읽어야겠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는 얼마 전에 에린이가 알려준 중고책 주문하는 법을 상기시켜서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박완서 책을 찾아보았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고 역시나 몇 권이 있었다. 그래서 3권을 주문했다. 그리고 어제 처음으로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었다.


원래는 그 전날 읽으려고 했는데 백신을 맞고 나니 힘이 없어서 그날은 먹고 자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제 오전에도 백신 핑계로 또 자고 딴짓을 하며 읽지 않고 있다가 오후가 되자 오늘도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각오로 카페에 가서 옆에 앉은 소녀들의 재잘거림에도 불구하고 읽어버렸다.






정확히 어떤 책인지도 모른 체 커버가 예뻐서 고른 박완서의 첫 번째 책은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고 하는 박완서의 에세이였다. 소설이 아닌 에세이여서인지 그녀가 아주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다. 그런데 좀 읽다 보니 시대가 왔다 갔다 하여 좀 헷갈렸다. 이 이야기에서는 40대라고 했는데 다른 이야기에서 그녀는 70대였다.


한 번에 쓰신 책이 아닌가? 하고 봤더니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쓰신 660편의 에세이 중에서 추린 글 35편이었다. 박완서 작가 10주기를 기리는 책이었던 것이다. 다시 프롤로그를 읽어보니 그렇게 적혀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었던지라 다 읽고 나서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 정도의 학력이라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이라고 했지만, 저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친숙함보다는 긴장감이 느껴지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습니다.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내면이 찔리는 것 같아 불편한 적도 있었습니다.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생전에 쓰신 660여 편의 에세이 중에서 추린 글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글쓴이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프롤로그


그렇게 나는 작가 박완서를 만났고 비밀 일기를 읽듯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녀의 마음을 훔쳐보았다. 문체도 글도 소박하고 맑았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라 감정을 잘 드러낸 솔직하고 담백한 글이었다. 오만할 것만 같았던 그녀의 글은 겸손했다. 그래서일까? 슬픈 내용이 아닌데 울컥울컥 하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나를 보았다. 무엇일까?


땅은 얼마나 위대한가? 일용할 양식과 함께, 그 아름다운 조락을 만들어낸 땅에 겸허하게 엎드려 경배드리고 싶은 충동과 아울러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요새 나의 감동은 이상하게도 슬픈 느낌과 상통하고 있다. 하다못해 깔끔하고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나서도 문득 슬퍼진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그녀가 내 맘을 읽은 것일까? 그녀도 나와 같다고 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 이 부분이었다. 다시 읽는 지금도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진실하게 쓰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거짓을 말하기 힘들어하는 나에게 '그래 잘하고 있어'하고 용기를 주는 것만 같았다. 엄마 같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나이 마흔에 가족들 몰래 삼 개월 동안 마음 졸이며 글을 썼고 그게 떡하니 당선이 되어 버린 그녀는 내 글이 활자가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지만 '직업이 작가'는 도저히 못 해 먹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던 그녀가 그저 열심히, 진심을 다해서 글을 썼고 그걸 40년 동안이나 꾸준하게 하면서 한국 문학계의 거장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문학이 무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문학을 한다고 생각하면 괜히 낯간지러워진다. 글이라는 걸 써 본 지 2년이 좀 지난 이제야 글을 잘 쓰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안 읽던 종류의 책을 읽어보고 매일 브런치에 글을 쓰다 보니, 문학가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박완서 작가보다 더 늦은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녀만큼 죽도록 글을 쓰지도 않았고 그녀만큼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기에 아직은 갈 길이 많은 초보 브런치 작가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서 앞으로는 더 오래 사는 세상이니(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쩌면 그녀보다 더 오랫동안 글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리는 내 마음이 변함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비록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녀처럼 나도 허튼소리 안 하고 정직하게 진실을 쓰는 노력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 나도 '직업이 작가'라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제야 만난 박완서 작가가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설레고 설레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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