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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Oct 20. 2021

혼자서 맞이한 결혼기념일

그리고 네 번의 결혼식


이렇게까지 오래 있을 줄은 몰랐다. 결혼기념일을 혼자서 맞이하다니!


삼 년 전 오늘,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내 계획은 만난 지 일 년이 되는 10월 10일에 결혼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날이 수요일이어서 토요일인 10월 20일에 결혼식을 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해 가을에도 시월 중순에 한파가 있었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날 몇 가지를 도와주기로 한 웨딩업체와 만나서 최종 점검을 하기로 했는데 그날이 그랬다.


야외결혼이라 모든 건 외부에서 점검을 해야 했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결혼식을 진행하고자 꽃 장식이랑 테이블 장식 등 소소한 건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날 와서 보니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멋진 장소에서 하는데 나의 결혼식을 축하해주러 오시는 분들께 최소한 잘 왔다는 마음이 들게 하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 슬며시 일어난 것이었다. 웨딩업체 대표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장식을 하나씩 추가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장식 사진을 찾아 대표님께 보여드리며 이렇게 해 주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고 대표님은 알겠노라 대답하셨다.


다른 건 다 마무리가 되었는데 테이블 매트 색상을 골라야 했다. 작은 것에 예민한지라 그 색상 고르는 게 쉽지 않아서 고민하다 보니 해가 지고 날은 점점 더 추워져서 꽁꽁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그곳은 산 아래에 있는 야외라 도심보다 더 추웠고 바람도 매서웠다. 남편도 나도 덜덜 떨고 있었다. 10월 13일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색상을 정했고 마지막으로 주문한 것들을 확인하고는 대표님과 헤어졌다.  

그토록 고민했던 테이블 매트와 장식

우려했던 바가 무색할 정도로 결혼식 날은 날씨가 좋았다. 따스한 햇살이 이천 평이나 되는 넓은 야외 가든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였고 곳곳에 피어있는 단풍들이 가을을 맘껏 뽐내고 있었다. 결혼식은 오후 5시였는데 3시부터 하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모두 나의 친구들이었다. 장소가 예뻐서 미리 온 친구들도 있었고 내가 결혼식 전에 야외 영하는 걸 아는 친구들도 있었다. 야외 촬영을 따로 하지 않았던지라 결혼식을 하기 전에 야외 촬영을 하면 어떻겠냐는 사진사 동생의 제안에 좋은 생각이라며 미리 와서 하게 된 것이었다.

야외촬영 사진중 가장 맘에 드는 컷

결혼식 장소 주인도, 사진사도 모두 지인이어서 그런 혜택이 주어진 것이었다. 날씨가 좋았는데 오후 5시가 되어 결혼식이 시작하고 생각보다 식이 길어지면서 얇디얇은 레이스의 웨딩드레스로 파고드는 차가운 기운이 웃으며 서있는 내 몸에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걸 눈치채시는 분은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추울까 봐 걱정이셨다.

즐거웠던 결혼식에 꽃비가 내린다

1부 식이 끝나고 2부는 한복으로 갈아입는 거였다. 한복 안에 준비해 간 하얀색 히트택을 아래위로 입어주었다. 그제야 따스함이 내 몸을 감쌌다. 한복 위에는 엄마가 가져오신 나의 숄을 둘렀다. 완벽했다! 추위에 강한 남편도 덜덜 떨다가 나와 같이 히트텍을 입고는 괜찮다고 했다. 실내에서 한복을 갈아입은 우리는 다시 야외무대로 나갔고 모두 건배를 하며 2부를 시작했다.

따시게 한복입고 쿠바에서 만나서 인연을 맺은 동생들과

식사를 하는 사람들, 춤을 추는 사람들 그리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결혼식은 밤 10시가 되어서 끝이 났고 가까운 친구 몇몇은 우리와 함께 새벽 한 시까지 그곳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결혼식을 아낌없이 축하해주었다.


결혼식을 하고 일주일 후 대구에서 가족들끼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족이라 함은 친척들을 말한다. 결혼식이 서울 그것도 도봉산 아래 야외 가든이라 대구에서 어른들이 오시기에는 쉽지 않은 길이고 또 처음부터 친구들과 스몰웨딩을 계획했기에(결론적으로 스몰웨딩에서 멀어졌지만) 친척들은 따로 대구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를 위한 엄마의 제안이었다.


대구는 엄마가 알아서 하시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엄마는 한정식 식당을 예약해 놓으셨고 그곳에 친가, 외가 친척들이 함께 모이셔서 나와 조단의 결혼을 축하해 주셨다. 나는 이모, 고모, 숙모, 삼촌 부자다. 그리고 나의 가족들은 보수적인 대구사람 답지 않게 대부분 마음이 열려있어서 모두들 조단을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셨다. 나이 많은 조카가 한참 어린 남자와 결혼하는데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쿠바라는 나라에서 온 까만 남자와 하는데도 모두들 진심으로 축복해 주셨다. 특히 큰고모는 내가 결혼을 하는 걸 드디어 보게 되셨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결혼식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한국에 와서 나는 가족들의 따듯한 마음을 참 많이 느꼈다.


한국에서 두 번의 결혼식을 하고 쿠바로 왔다. 그곳에서 우리는 또 결혼식을 했다. 이번에는 남편의 가족들과 함께였다. 한국에서는 가든에서 했으니 쿠바에서는 바닷가에서 하고 싶었다. 그래서 바닷가 근처 집들을 찾아다니며 계획을 해 보았지만 교통편부터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지 않아서 결국은 포기를 했고 아바나 내에서 하기로 했다. 운 좋게도 방 7개, 화장실 7개에 수영장과 야외 식당, 바가 딸려있는 저택을 빌릴 수가 있었다. 예전 철도공사 사장님이 살던 집이라고 했다.


장소가 좁은 관계로 많은 이들을 초대하지는 못하고 40여 명의 가까운 친척들만 초대를 해서 12월 15일에 쿠바에서 결혼식을 했다. 그중에 나의 한국인 하객도 세 명이 있었다. 멕시코 다녀오다가 만난 한국인 남자 동생이랑 당시 쿠바에서 한달살이를 하시던 손미나 작가님과 그녀의 일행이었다. 미나 님과 일행분께서 내 머리에 꽃도 꽂아주시고 웨딩드레스 끈도 묶어주셨다. 쿠바에서는 들러리도 없고 혼자서 가져간 드레스를 입고 메이크업을 하고 헤어를 해야 해서 살짝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녀들 덕분에 걱정이 사라져 버렸다.

하객이셨던 손미나님과 함께

그로부터 5일 후 쿠바에서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다. 이 날을 위해서 나는 쿠바에 도착하자마자 서류를 하러 쿠바에 도착하자마자 멕시코에 다녀왔고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서 결국 혼인신고 서류를 제출할 수가 있었다. 힘든 과정을 거쳐서 하게 된 혼인신고여서 더 소중하게 여겨졌을까? 아니면 혼인신고 자체가 나를 사회적인 제도 안에 묶는 거라 긴장이 되었을까? 아무튼 그랬다 그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쿠바에서는 혼인 신고를 하는 날이 결혼식이라 혼인신고를 하는 날 신부들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나는 결혼식을 이미 한 지라 나에게 있는 검은색 물방울무늬 무늬의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혼인신고를 했다. 쿠바에서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그날 우리는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 두 번 그리고 쿠바에서 두 번, 총 네 번의 결혼식을 했다. 모두 다른 종류였지만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결혼식 사회를 봤던 친한 오빠가 말했다.


"니는 아무리 결혼 늦게 한다고 해도 뭔 결혼식을 이래 많이 하노?"


경상도 사람이라 사투리를 쓰는 오빠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런 것 같아서 깔깔대며 웃어버렸다.






글을 쓰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쿠바는 아직 10월 19일인데 한국이 20일이니까 축하를 해 주었다. 날씨는 춥고 남편은 없으니 결혼 기념이라고 해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런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게 좋은 건데 혼자 있으니 외로움이 스며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지.


나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에는 남편의 이름과 결혼식을 한 날짜가 적혀있다. 물론 남편의 반지에는 내 이름과 결혼식 날짜가 적혀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날은 잊어도 이 날은 잊을 수가 없을 테다. 기억이 가물해지면 반지를 보면 되니까.


혼자만의 결혼기념일은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겠지. 그리고 내년에는 함께 웃으며 보낼 수 있겠지.

암,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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