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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Jul 30. 2022

모두가 맨발이었다

오랜만에 산길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장마 전에는 산길로 올라갔다가 큰길로 내려왔는데 장마로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지난번에 올라가 보니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군데군데 길을 막아둔 곳이 있어서 요 몇 주동안 계속 큰 길로만 남산을 올라갔더랬다.


좁은 산길을 올라가다가 할아버지 세 분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그중 맨 앞에서 씩씩하게 오르는 분의 발을 우연히 보았는데 맨발이었다. 평지에서 맨발은 이해하지만 산길은 가시도 많고 작은 돌도 많을 텐데 맨발로 걸으시다니! 게다가 그분은 걸음이 빠르셔서 맨발임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잘 걸으셨다. 일행인 줄 알았던 다른 두 분과 격차가 많이 나길래 살펴보니 혼자 오신 분이었다. 그분을 앞서다가 잠시 안내표지판 사진을 찍는 동안 내 앞으로 진격하셔서 다시 뒤에서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다 잠시 후, 한 무리의 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나셨는데 그분들도 맨발이었다. 설마? 하며 한 분씩 발을 다 확인했데 열 분이 넘는 분들 중에서 맨발이 아닌 이가 한분도 없었다. 그곳에서 신발을 신은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거기엔 멍석 같은 게 깔려있어 산길보다는 안전했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요즘 맨발로 산책하기가 유행인가?


산에서 맨발로 걷는 게 건강에 좋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체로 맨발인 경우는 처음 봐서 신기했던 것이었다. 게 중 어떤 분은 그곳에 운동화를 벗어놓고 왔다 갔다 하시는 건지 좀 더 걷다가 운동화 한 켤레가 나뭇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문득, 그분들 사이에서 걷다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모두가 맨발인 곳에서 나 혼자 신발을 신고 있으니 왠지 나도 신발을 벗어야만 할 것 같았다. 만약 짧은 구간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걷는데 모두가 맨발이면 신발을 신고 걷는 내가 잘못된 것 같아서 나도 벗어야지 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신발을 신고 걷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나란 사람에게 내 의견이 없고, 늘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나도 얼떨결에 신발을 벗을 수도 있겠구나. 신발을 벗고 산길을 걷는 건 건강에 좋은 일이지만, 만약 좋은 일이 아닌데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똑같이 하고 있다면 올바른 가치관이 없거나 판단력이 없는 경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충분히 휩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발의 어른들을 보다가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버렸나? 훗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좁은 산 길이 끝이 났고 큰 길이 나왔다. 이른 토요일 아침인데 많은 분들이 산책을 하고 계셨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발을 먼저 확인했다. 큰길에서는 모두가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걸 보니, 내가 별 생각을 다 했네 하며 그냥 씩 웃어 버렸다.


잠시 후 벤치가 보여 글을 쓸 겸 앉았는데 곧이어 맨발의 할아버지가 내가 앉은 벤치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시더니 긴 바지를 벗으시는 것이었다. 뭐지? 하고 봤더니 반바지가 나왔고, 수건을 꺼내어 발을 닦으시고는 신발을 신으셨다. 산 길에서만 맨발이었던 것이었고 큰길에서는 신발을 신으셨다. 정상인으로 변신! 하하하


발이 안 좋아서 예민한 나는 아무것도 없고 평탄한 곳에서는 맨발로 걷기가 가능하겠지만 산길에서 맨발로 걷는 건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건강을 위하여 산길에서 맨발로 걸으시는 어른들이 대단해 보였다.


나는 요즘 매일 아침 남산에 오를 때가 참 행복하다. 초록 초록한 나무들을 보면 눈이 시원해지면서 멀리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잘 보이는 것 같고, 초록의 푸르른 향이 온몸을 자극해 걷는 내내 기분이 시원하다. 오늘 아침엔 마치 가을 인양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 땀으로 꾸덕해진 내 몸을 말려주었고, 하늘까지 맑아서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매일 산에 가다 보니 간간히 재미있는 분들을 만나게 되니 혼자 가는 산길이 외롭지가 않다. 내일은 더 일찍 일어나서 남산에 가야겠다. 일요일에는 사람들이 더 많을 테니.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찍은 울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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