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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이야기] NAIDOC 주간 어셈블리의 감동

호주 초등학생들의 노래로 잊혀진 역사 배우기

by 꿈꾸는자

오늘 아이들 학교에서 NAIDOC 주간을 기념하는 어셈블리(한국 학교의 전교생 조회와 비슷한 시간)가 열렸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아이들이 원주민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함께 기리는 시간을 갖는다. 늘 의미 있는 자리지만, 아이들이 부른 노래, Jenny Gaunt의 〈Warrior〉를 듣고 있자니 깊은 울림이 있었다.


NAIDOC Week는 매년 7월 첫째 주, 호주 전역에서 열리는 행사로, 호주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원주민(Torres Strait Islander peoples)의 역사, 문화, 업적을 기리고 축하하는 주간이다. NAIDOC은 ‘National Aborigines and Islanders Day Observance Committee’의 약자인데, 지금은 그 의미가 확장되어 학교, 직장, 지역사회 등 다양한 곳에서 기념행사와 교육 활동이 펼쳐진다. 이 시기는 원주민 공동체의 정체성과 권리를 되새기고, 온 국민이 함께 배우는 시간으로 여겨진다.

* 요즘은 ‘에보리진’이라는 표현 대신 “Aboriginal people”, “First Nations people”, 또는 더 포괄적인 의미의 “Indigenous Australians”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호주의 초등학교에서는 어셈블리가 시작되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조용해진다. 만 5세 Pre-primary 학생부터 6학년까지 800명이 넘는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이지만,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는 선생님 한 명 없이도 행사가 시작되면 쥐 죽은 듯 고요해진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런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집중하는 분위기와 태도를 익혀가는 듯하다.


어셈블리에는 학부모들도 참석할 수 있는데, 보통은 자기 아이가 상을 받는 날이나 크리스마스, Book Week 같은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경우에만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집 아이들이 “오늘 이 노래 부르니까 구경 와” “오늘은 이런 거 하니까 보러 와”라고 늘 이야기하는 편이라, 다른 일정이 없으면 가급적 참석하려 한다. 그 시간 동안 학교의 분위기를 느끼고, 아이들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돌아오는 일은 늘 기분 좋은 여운을 남긴다. 이번 NAIDOC 어셈블리도 학교 측에서 사전 안내를 해주었지만, 참석한 학부모는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이렇게 의미 있는 노래를 부르는 날, 조금 더 많은 부모들이 함께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오늘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의미는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매번 행사 때마다 전 학년이 같이 배우는 노래를 2~3곡씩 부르는데, 아이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합창을 넘어서 하나의 서사처럼 울려 퍼졌다. 아이들이 부른 〈Warrior〉는 단순한 멜로디를 넘어, 깊은 의미와 호주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음악 선생님이 해주시는 설명을 듣고 노래를 들으니 그저 좋은 음악이 아닌 누군가의 삶과 정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Warrior〉는 서호주 지역의 Noongar 원주민 전사 야간(Yagan)의 삶을 기리는 곡이다. 아이들이 이 노래를 집에서 자주 흥얼거렸지만, 그 이야기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와 조금 더 찾아보니 야간은 1800년대 초, 지금의 퍼스 지역이 점점 영국 식민지로 잠식되던 시기에 이 땅과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운 인물이었다.

* Noongar는 서호주 지역에 사는 원주민 부족으로,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공동체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위험인물’로 낙인찍혔지만, 지금은 자신의 땅을 침범한 외세에 저항한 전사로서의 용기와 정체성의 상징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식민 당국에 의해 살해된 뒤 그의 머리는 절단되어 영국 리버풀 박물관으로 보내졌고, ‘인류학적 표본’이라는 명목으로 보관되었다고 한다. 그 시기 많은 원주민 지도자들의 신체 일부가 ‘연구’나 ‘전시’라는 명목으로 유럽에 보내졌다는데, 이는 엄청난 인권 침해이자 매우 잔인한 일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 호주 사회는 원주민 역사를 다시 바라보려는 흐름 속에서 야간의 이야기를 새롭게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Noongar 공동체의 오랜 요청 끝에 1997년 그의 두개골이 고국으로 반환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퍼스 도심 한복판에 그의 이름을 딴 Yagan Square가 있고, 이곳은 원주민 문화와 현대 도시가 만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동상과 함께 Noongar 문화에 대한 다양한 예술 작품과 이야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에 야간 스퀘어에 가본 적이 있지만, 그런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건 이번 어셈블리를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노래는 야간을 단순히 과거의 인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존재로 되살려낸다. 노래 한 곡이 이토록 깊은 이야기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이 참 인상 깊었다.


〈Warrior〉를 작곡한 Jenny Gaunt는 퍼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자, 그리고 사회적 예술가다. 그녀는 단지 음악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노래를 통해 공동체의 기억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 곡 역시 Noongar 커뮤니티와의 협의를 통해 제작되었고, 아이들이 노래를 배우는 과정에서도 그 문화적 배경과 의미를 함께 익힐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작년에는 Perth RAC Arena에서 열린 대규모 어린이 합창 축제인 One Big Voice에서도 이 곡이 불렸다. 4,000명이 넘는 초등학생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이 노래를 합창했고,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다고 한다. 단지 노래를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들이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자신의 목소리로 존중하고 기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 One Big Voice

https://youtu.be/9za2OFIIuHE?si=Qf_7lAiJFcAd8XUx

또 이 노래를 학교 선생님들에게 가르치는 워크숍 영상도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먼저 노래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그 감동을 품은 채 아이들에게 전해주었을 것 같다.
� 선생님 대상 워크숍 영상

https://fb.watch/B8BdDQ1xnB/?mibextid=z4kJoQ


두 번째로 불렀던 곡은 Yabu Band라는 원주민 록밴드의 〈Gundulla (We Dance)〉였다. 첫 곡이 깊은 울림이 있는 곡이었다면, 이 노래는 모두가 함께 리듬에 몸을 실으며 하나 되는 순간의 에너지를 전해준다. Noongar 언어와 영어가 섞인 가사, 반복되는 후렴구, 그리고 신나는 리듬을 통해 공동체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주는 곡이었다. 아이들은 몸을 살짝 흔들며 즐겁게 따라 불렀는데 그 안에서도 분명 어떤 문화적 공감과 연결이 이뤄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 노래를 부른 일도 단순한 음악 활동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그 안의 깊은 이야기를 배우고, 기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이들이 살아가는 호주의 역사뿐 아니라, 부모가 나고 자란 한국의 역사도 언젠가 아이들에게 잘 설명해 줄 수 있기를.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적어도 부모가 먼저 관심을 갖고 하나씩 함께 알아가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만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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