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이 처음이 아이들.
이상하리만큼 선명한 기억이 있다.
유년 시절을 포함해 대부분의 인생을 주택에서 살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이전 아파트에 살 때 그렇게 정전이 자주 됐었다.
서걱거리는 서재 첫 번째 책장 아래 있는 서랍에는 항상 하얀 초가 있었고
정전이 돼서 급하게 초가 필요할 때마다
그 서랍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잘 열리지 않았고
결국에 닫을 땐 발로 뻥 차면서 내 발만 아팠던 그 기억
그리고 언제부턴가 정전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러니 내 아이들이 이걸 겪어 봤을 리가 있나.
작년 1월
실리콘 밸리의 심장이라 불리는 산호세로 넘어왔다.
산호세는 겨울에 폭풍이 오기 때문에 으슬으슬 춥다고 들었다.
그렇게 우리가 랜딩한 지 5일 정도 됐을까?
외출하고 돌아왔는데 가라지 문이 열리지 않는다.
어라? 여보 이상해. 가라지가 안 열려.
- 뭐지? 일단 현관으로 들어가자.
그렇게 현관으로 들어가서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여보~! 냉장고에 불이 안 들어와.
여보~! 와이파이도 안돼!
엄마! 화장실 불이 안 켜져.
그렇다.
정전.
Blackout.
그때는 가구도 없어서 에어매트 위에 전기장판을 두고 지낼 때였다.
다행히 저녁은 먹고 들어온 상태.
스마트폰 충전도 되지 않기에, 각자 폰은 비행기 모드로 두고
손전등 기능만 켜서 급히 세수 양치만 한 상태로 온 식구가 패딩 잠바를 입고 꼭 껴안고 잤다.
후우.. 신고식 한번 거하다 그치?
하고 지난 게 이틀.
그렇다. 이틀 뒤.
남편은 고객과의 석식이 있다고 늦고,
나와 아이들은 TV를 보면서 단프라 박스 위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TV가 뚝 꺼졌다.
이제는 lesson learn이 있지.
훗, 바로 애들한테
자, 저녁 얼른 다 입에 넣고 올라가자.
잘 시간이다.
지유의 성장 주사와 여성 호르몬 억제제 주사가 가득했던 냉장고였기에,
그리고 이 주사약들은 온도에 민감했기에
정전이 되면 냉장고 문 개방 금지령까지 내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급하게 파워뱅크라고 불리는 비장 전력 장치를 구입했다.
또 선박 짐이 도착하고 나서는 캠핑 짐 속 랜턴을 꺼내 집 이곳저곳에 두고 정전을 대비했다.
다행히 올해는 아직 정전을 겪진 않았지만, 이제는 지유의 주사 약도 다 사용했고,
조금 더 여유롭게 하하 웃으며 정전이구나 할 수 있는 실리콘 밸리식 마음가짐을 장착했다.
엄마 아빠가 어릴 땐 정전이 일어나면 초를 피웠었다.
하니,
초는 생일 축하 노래 부를 때만 켜는 거 아니냐고 두 눈 동그레지던 아이들이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정전을 전 세계의 최첨단을 이끄는 실리콘 밸리의 심장인 이 도시에 와서 겪는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나중엔 이 아이들이 커서,
‘라떼는 말이야, 정전이라는 게 있었어’라고 웃으며 이야기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