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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Nov 06. 2024

헌 책

‘소유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다소 탐욕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그 소유욕이 좀 있는 편이다. 특징적이라면 값나가는 비싼 물건들 앞에서 생겨나는 소유욕보다는 다소 의외의 것들 앞에서 내 것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생긴달까.

그런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책’이다. 

요즘은 도서관에서도 곧잘 책을 빌려 읽곤 하고, 전자책도 잘 읽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소유’의 종이책만을 읽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면 왠지 모르게 반납날짜를 자꾸 상기하게 되고, 조급한 마음이 들면 책 속의 글자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지인들에게 책을 빌려 읽을 때도 내가 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깨끗하게 읽고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맘껏 가방에 넣지도 못하고 조심조심 읽느라 책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는커녕 글자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전자책을 사도 뭔가 책을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고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생각해 보니 종이책이 잃어버릴 확률이 더 높은데) 언제나 내돈내산 종이책만을 읽어왔던 것이다.


지금이야 전자책도, 도서관도 너무나 애용하지만 내돈내산 종이책만 읽던 시절에는 중고책방이나 헌책방에서도 책을 많이 샀다(지금 전자책과 도서관을 함께 이용하면서 종이책을 사는 일이 줄었느냐면.. 그건 아니다). 책 내용은 변함없는데 겉모습이 조금 낡았다는 이유로 할인이 된다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엄청난 매력임에 틀림없었다. 

새책을 판매하는 서점에 가면 향기로운 새 종이의 냄새와 알싸한 듯 느껴지는 잉크의 냄새가 참 좋다. 빳빳한 표지와 차르르 넘어가는 내지가 서로 맞부딪히며 내는 소리도 청량하게 느껴지는 데다가 갓 세상에 나온 책들이 자신들을 집으로 데려가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일생 가장 반짝이는 모습으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각자의 지혜와 재미와 감동을 담은 책들이 그렇게 조신히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반면 헌책방은 또 다른 느낌이다.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은 종이가 풍기는 쿰쿰한 냄새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다. 나름의 질서로 천장까지 닿은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은 새책만큼의 반짝임은 없지만 원래 책이 갖고 있던 지혜와 재미와 감동에 더해 세월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았다가 다시금 되돌려진, 어쩌면 슬픔 또한 담고 있을지도. 하루가 끝나고 헌책방에도 불이 꺼지면 책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너는 어디에서 왔니?’, ‘너는 어떤 주인의 어떤 책장에서 살았니?’ 하며 밤새 소곤거릴 것만 같다. 한때는 반짝이며 누군가의 책장에 꽂히길 기다리면서 새 종이와 새 잉크의 냄새를 풍겼던 책들이 어떤 사연으로 낡은 종이냄새와 묵은 잉크의 냄새를 풍기며 쿰쿰한 곰팡내까지 덧입게 되었는지 아침이 올 때까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상을 한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선물로 받는 것을 기뻐할 사람이 얼마나 있으려나? 책은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꽤 많이 있다. 원래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한다 하더라도 독서엔 취향이 분명하기 때문에 취향에 맞는 책을 고르는 일은 엄청난 고민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내 지인들 중에도 내가 책을 선물하는 사람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책을 좋아하면서도 독서취향까지 잘 알고 있는 친구 거나, 내가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을 꼭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 그리고 책 선물의 묘미는 이 책을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은 이유가 담긴 작은 편지를 곁들이거나 책 첫 장에 쓰는 간단한 인사말이다. 나 역시 그런 책선물을 받았을 때 느낀 감동이 좋아서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도 웬만하면 짧은 글을 함께하는 편이다.


얼마 전 중고서점에서 책을 구매한 적이 있다.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된 소설책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팔았는지 서가에 굉장히 많이 꽂혀있었다. 책의 보관상태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큰 차이는 없어서 여러 권의 책 중 가장 깔끔해 보이는 책으로 한 권씩 집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씻고 잠들기 전에 사 온 책 중 첫 번째 책을 침대에 누워 펼쳐 들었는데, 표지 바로 옆 제일 첫 장에 짧은 편지가 쓰여있었다. ‘ㅇㅇ에게. 올해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가 있던 한 해였지.’라는 말로 시작하는 2006년 12월에 쓰인 글귀였다. 무려 20여 년 전 누군가의 마음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선물한 사람과 선물 받은 책을 중고서점에 팔아야 했던 두 사람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사뭇 궁금한 마음이 생기던 찰나 혹시나 싶어 나머지 한 권도 첫 장을 열어봤는데, 정말 놀랍게도 ‘ㅇㅇ아, 사랑한다.’라고 첫 번째 책에 편지를 쓴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쓴 사랑의 문장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많은 책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한 사람에게 선물한 두 권의 책을 운명처럼 집어 들었던 것이다. 이 책 안에는 소설의 내용뿐 아니라 한때는 소중했을 누군가의 마음까지 담겨있다고 생각하니, 책이 더 무겁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만약 서가에서 책을 꺼냈을 때 이 편지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래도 나는 책을 샀을까? 나는 어떻게 그 많은 책들 사이에서 딱 이 두 권을 골라 든 걸까? 

어쩌면 편지의 주인공들은 지금은 더 이상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책을 내놓은 지도. 그렇지만 책 속에 그 편지들이 새겨질 때 같이 새겨 넣었던 마음만은 여전히 끈끈해서 서로 헤어지지 못하고 한꺼번에 내 손에 잡혀 들어온 걸까. 


중고서점의 불이 꺼졌을 때, 두 권의 책은 밤마다 소곤거리며 약속한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고, 어디로 가던지 언제나 함께 있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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