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계절

by 린다

책을 읽을 때도 글을 쓸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주로 내 옆에 있는 것은 커피다. 직업으로서 하는 커피는 이제는 꽤 지겨워졌지만, 여전히 혼자서 다른 일에 몰두하거나 휴식시간에 여유를 즐길 때의 커피는 변함없이 향기롭고 황홀하다. 머리만 닿으면 바로 잠이 드는 복을 가진 나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커피를 챙겨 마셔도 밤에 잘 자는 편이다. 그래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면 시간에 관계없이 마시곤 하지만, 그럼에도 잠들기 직전인 오밤중에는 되도록이면 피한다. 늦은 밤 즐기는 커피가 나를 잠 못 들게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양심의 문제랄까.

더불어 요즘엔 하루에 마시는 커피의 양을 조절하고 있다. 생각 없이 많이 마셨다가는 아무래도 건강에 안 좋은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 팔팔하기만 한 20대도 아니고, 이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던지 ‘건강’이라는 키워드를 끼워 넣어 생각해봐야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결국엔 좋아하는 것을 오래오래 즐기고픈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커피를 줄이기로 마음먹기 전에도 겨울밤에는 종종 차를 즐겨 마시곤 했다. 왠지 차는 따뜻하게 마셔야 제맛일 것만 같고, 따뜻하게 우려낸 차는 겨울에 마시면 더욱 맛있게 느껴지니까. 어느덧 겨울의 한가운데, 그러니까 따뜻한 차가 맛있어지는 계절을 보내고 있다.


차를 즐겨마신다고 해서 여느 차를 즐긴다는 사람들처럼 도구나 지식을 제대로 갖춰 즐기고 있지는 않다. 잎차를 우려낼 수 있는 인퓨저정도만 있고, 그것도 귀찮다면 티백을 구매해서 손쉽게 우려 마시는 정도일 뿐이다. 소위말하는 ‘덕질’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관심 있는 분야를 계속 파고들어 어느샌가 그 분야에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갖게 되겠지만, 나처럼 덕질보다는 다양한 분야에 얕은 관심을 가지며 사는 사람들은 차를 즐길 때 티백만으로도 꽤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본업인 커피를 하면서 이미 뼈아프게 알게 된 사실이다. 내가 처음 커피에 관심을 갖고 배우기 시작하기 전에는 웬만한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셔도 그 자체로 행복감을 느끼곤 했다. 드립백으로 추출해 마시는 것도 기분전환이 됐고, 궁금해서 구매한 드립커피 도구들로 집에서 아무렇게나 내려 마셔도 핸드드립을 하는 그 행위만으로도 이미 재미를 느꼈다. 그러다 커피를 배우는 것에 점점 돈과 시간을 쏟아붓다 보니 커피맛에 엄격해지고, 행복감을 느끼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맛있다고 찾아간 카페에서 아쉬움을 느끼고, 내가 추출한 커피에서 결점을 발견하면 좌절하고, 계속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생두의 가공방법을 발 빠르게 쫒아야 하니 힘들었다. 아마 나는 ‘덕질’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내게 어떤 아이돌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다들 좋아한다는 아이돌가수를 나도 좋아하는 척 연기했던 것도, 장래희망을 적는 칸에 수없이 많은 직업들이 바뀌어 등장했던 것도 다 그래서였구나 하고. 어쩌면 실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스캔들이나 사건사고에 우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그처럼 마음 아프고 싶지 않았고, 내 능력이 어떤 직업을 갖기에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로 인해 너무 크게 좌절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어느샌가 커피를 알아가는 일에 속도를 많이 늦추게 된 것 같다. 덕질에 소질이 없는 내가 커피에서 좀 더 자주 행복감을 느꼈으면 하는 조치였다. 나의 어딘가에 아주 미미하게 존재하는 덕질능력은 잘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꼭 필요한 한 사람에게만 쓰는 걸로.


그렇게 조금은 느슨한 관심과 적당한 거리감으로 나는 겨울의 차를 즐기고 있다. 커피의 세계만큼이나 차의 세계도 무궁무진할 테고 그 모든 것들을 빠삭하게 알고 싶은 마음도 역시 내 안에 있기는 하지만 또 많이 알아갈수록 온전히 즐기기보단 엄격한 잣대가 등장할 것 같아 지금은 이대로 만족하고 있다. 그래도 우연히 좋은 차를 마시게 되는 날에는 그와 관련된 것들을 검색해 보며 또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기도 한다. 그저 그렇게 내게 다가오는 정보들은 알아가는 재미로 받아들이지만 누구보다 먼저 최신 정보를 얻으려 하거나 지금보다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부러 들이지 않고 있다. 사실 조금 귀찮기도 하고. 어쩌면 나의 이런 ‘희미한 덕력’이 한 분야에 특별한 재능이 있기보단 두루두루 야트막한 재능을 가지고 사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세작녹차와 호지차, 페퍼민트, 작두콩차 등을 즐겨마시고 있다. 어릴 땐 녹차를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녹차의 맛이 때때로 큰 위로가 된다. 세작녹차는 얼마 전 M의 집에 초대받아 놀러 갔을 때 M이 내려준 맛에 반한 이후로 나도 같은 제품을 구입해 즐겨 내려마시고 있다. 예상했던 데로 녹차의 세계도 깊이가 있어서 녹차의 어린잎도 5월 이전, 5월 중순, 5월 하순 중 언제 채취하느냐에 따라 세작, 중작, 대작 이런 식으로 세세하게 나뉜다고 한다. 우려낼 때도 너무 팔팔 끓는 고온보다는 70~80도 정도로 내리면 더 맛있는 녹차를 즐길 수 있다는데, 내가 알고 있는 건 딱 거기까지다. 호지차는 녹차보다 더 고소해서 맛있고, 비염이 고개를 내미는 계절엔 작정하고 작두콩차를 마시면 한결 낫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난 후에는 산뜻한 페퍼민트차를 차갑게 내려마시면 기분이 좋다는 딱 그 정도.


오래전 우연히 잎차 한 봉지가 내 손에 들어온 적이 있다. 티백이 아닌 잎차를 어떻게 마셔야 할지 몰라서 인터넷에 티팟을 검색해 봤더니 가격도 천차만별인 데다가 품질이 좋지 않은 티팟은 차를 따를 때 물줄기가 아주 천방지축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좋은 티팟을 써야 한다는 글들이 많이 보였다. 금세 머리가 아파져서 검색을 그만두고 퇴근하는 길에 다이소에 들러 3천 원짜리 티팟을 하나 구매했다. 차분한 흰빛깔을 띄는 도자기 티팟이었다. 진열되어 있는 티팟들 중 가장 무난하고 점잖아 보이는 제품이라 골랐는데, 차를 우려 잔에 따라보니 역시나 물줄기가 천방지축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티팟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술잔 하나를 찬장에서 꺼내고, 굴러다니는 우드 트레이에 잔과 티팟을 올려보니 꽤 괜찮아 보여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얼마 후 블로그 댓글 알림이 울려 들어가 봤는데 다기가 너무 단정하고 아름답다며 어디서 구매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 그럴싸한 전문 매장이나 브랜드가 아니라 선뜻 답변하기에 망설여졌다. 하지만 곧 솔직하게 다이소에서 구매했다고 답변을 했고, 생각지도 못했다며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이 있으신가 보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당장 다이소를 가봐야겠다고.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과 안도감이 들었다. 다이소에서 구매했다고 하면 ‘차는 그렇게 즐기면 안 된다’ 라거나 ‘좋은 도구를 써야 진정한 차의 맛을 안다’라는 등의 원치 않는 훈계를 듣는 것이 아닐까 내심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예전부터 좋아 보이는 것이 있으면 좀 더 경제적으로 즐겨볼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찾아보곤 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원데이클래스부터 찾아보는 식의 다소 얕고 쉽게 접근하는 것을 좋아했다. 에코백이나 몇만 원짜리 인조가방을 들어도 나와 잘 어울리거나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이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잘 들고 다니는 내게 ‘30대쯤 되었으면 명품가방 하나쯤은 있어야지’라는 말을 자주 하던 사람들과 주로 시내주행만 해서 경차로도 충분한데 ‘이제 나이도 있으니 번듯한 차를 타고 다녀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좋아서 구매한 것들과 행위들을 두고 돌아올 훈계들을 미리 걱정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아름다운 것과 가격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항상 잊는 것 같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도,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의 문제라는 것도.


어떤 것을 좋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레 깊이 알아가게 되어가는 것을 애써 외면하거나 거부하고 싶진 않다. 그저 나만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속도에 맞춰 좋아하는 것을 오래오래 좋아하고 싶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집에도 제법 그럴싸한 다관이나 다도세트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는, 아니 그때가 되어서도 여전히 좋아하는 차를 마시고,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미지근한 듯 차갑지 않은 온도로 쭉 좋아하던 것들을 좋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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