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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지 Lindsey May 13. 2022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계약서

두 달간 집 찾기의 결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계약서

  두 달을 밤낮으로 뒤적였다. 직방, 오일장, 교차로, 대학교 홈페이지 게시판, 하우스넷…. 도대체 우리집은 어디 꽁꽁 숨은걸까? 그도 그럴 것이 집을 찾아볼수록 나는 점점 더 picky(까다로운, 별스러운)한 사람이 되었고 원하는 집 조건도 하나 둘 늘어만 갔다. 보는 눈만 잔뜩 높아진 것이다. 매매도, 전세도 아니고 월세집 구하는데 이 정도면 나중에 ‘내 집’ 고를 땐 어쩌려고. 어찌 됐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잔뜩 늘어난 우리의 월셋집 조건은 이랬다.



하나. 남편 직장과 가까운 집

둘. 어린이집까지 아기를 안고 걸어가도 거뜬한 거리 내의 집

셋. 사계절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안전한 산책로 가까이에 있는 집

넷. 걸을 수 있는 거리 내에 필라테스센터, 3개 이상의 카페, 식료품 가게가 있는 집

여섯. 적당한 사람의 온기와 포근한 느낌이 있는 방, 쾌적한 화장실을 갖춘 집

일곱. 책 고플 때, 인사이트가 필요할 때 서점에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집

여덟. 아기가 아프거나 도움이 급하게 필요한 상황에 대비해 친정/시댁 식구와 적당히 가까운 집

아홉. 헐거워진 지갑 사정에 무리가 가지 않는 집

열. 반려견 도담이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집(별 5개)     


  

  카시트 거부하는 딸내미 덕에 가동성이 훅 줄어든 만큼 조건이 늘었다. 집 고르는 데에 까탈스러운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써 내려가 보니 왜 그리도 집 찾기가 어려웠는지 딱 알겠다. 사실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구해줘, 홈즈’ TV 프로그램에 신청서라도 넣어보았어야 했나. 허허. 그 와중에 문제가 생겼다. 웬만한 조건을 갖추는 집을 찾더라도 매번 열 번째 조항(반려견 도담이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집)에서 걸렸다. ‘아니, 천만 반려견 시대에 다들 어디서 살고 있는 거지?’ 생각이 들 정도로 다들 ‘반려견 사절’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보겠다고 이글이글 두 눈에 불을 밝히는 동안, 남편은 무심한 듯 나를 내버려 뒀다. 애초에 나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출 집은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천진하게 이 조건 저 조건 따지는 동안 남편은 ‘텅장’ (장기화된 코시국의 영향과 이런저런 상황으로 인해 빚이 쌓인 채로 사업을 정리하게 되었다.)이 되어버린 가계 사정에 맞는 집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까똑 까똑 까똑 까똑!’ 직장에 일하러 나간 남편이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뭐야, 이 사람. 일하러 가서도 이렇게 생각하는고야?♥’하며 메시지를 확인해보는데 웬 방 사진들이 줄지어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점심시간 커피 한잔 사러 나갔다가 카페 맞은편에 ‘임대’ 현수막 걸린 집을 발견해서 가보았다는 것. 게다가 내가 노래를 부르던 조건들에 딱 맞는 집이라는 것이다. (늘 이런 식이다. 나는 부지런히 요란을 떨지만 실속이 없을 때가 많고, 남편은 호랑이처럼 어슬렁거리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와락 신의 한 수를 날린다.)  “위치는 oo커피 맞은편이고, 사진들 한번 봐봐. 1.5룸이긴 한데 방도 넓게 나온 편이고 깨끗해.” 어쩜, 위치 또한 나의 (욕심) 희망 조건들과도 딱 들어맞았다.      


  무엇보다 우리 도담이를 받아주신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 세 분이 집을 보러 오시기로 하셨다고 하셔서 마음이 조금 바빠졌다. 게다가 주인아주머니께서 다시 전화가 와서 “혹시 강아지가 많이 짖나요? 시끄러우면 좀 곤란한데... 저 우리 집 아저씨한테 혼났어요. 반려견 된다고 했다가.”라는 전화를 받는 순간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다행히 도담이는 개냥이 과라 조용히 사색을 즐기는 시간이 많은 강아지였다. 강아지 캐릭터에 대해서는 잘 말씀을 드렸다 “강아지 쪼끄맣고 대소변 아주 잘 가려요. 거의 짖는 일도 없구요. 계약금 입금하면 되는거죠?!!!”     


  그렇게 남편이 보낸 사진만 보고 덜컥 집을 선택하게 되었다. 조금 웃픈 상황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만족도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은가. “아유, 와이프가 집 한 번 봐봐야지 않나요? 괜찮겠어요?” 하며 주인아주머니께서 재차 확인하셨지만 나는 남편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집이야 어찌 됐든 못 질 안 하는 선에서 애정 담아 꾸며보면 되는 거고, 동네 전체를 우리 집 앞마당 삼아 즐겁게 지내봐야지. 이미 마음은 안방에 두 다리를 뻗고 누워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두근두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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