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에는 오페라 극장이 없더라
오늘 오전의 목적지는 스페인광장이다. 숙소에서 스페인광장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이다. 어제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지도를 펴가며 천천히 걷는다. 얼마 안 가 멀지 않은 곳에 <황금의 탑>이 보인다. 과달키비르 강가에 세워진 황금의 탑은 일찍이 무어인들이 1,220년에 세운 수비탑이다. 12면으로 된 탑의 상부에 금박 모자이크가 입혀져 있어서 황금의 탑으로 불린다 한다. 800년이나 된 탑은 아직도 튼튼해 보인다. 입장료를 내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지만 우리는 생략하고 강을 따라 걷는다.
과달키비르강의 폭은 한강만큼은 아니지만 우리가 본 유럽의 강 중에 가장 넓다.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들어 가는 이 강이야 말로 안달루시아의 젖줄이다. 강변은 한강의 고수부지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 곳곳에 벤치도 놓여있고, 멋있는 유람선들이 아침부터 강을 오르내리고 있다. 강을 따라 10여분을 더 가니 건너편에 숲이 무성한 마리아 루이사공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스페인광장은 공원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마리아 루이사공원 길을 상쾌한 기분으로 걷는데 가끔 지나다니는 마차의 금속성 바뀌 소리가 벌써 광장이 가까왔음을 알려 준다. 드디어 스페인광장이 눈앞에 시원한 물줄기를 뿜으며 나타난다. 스페인 광장은 로마와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여러 곳에 있지만 과연 기대했던 대로 세비야의 스페인광장은 단연 최고다.
광장은 엄청나게 넓은데 스페인식 붉은 건물이 기다란 학의 날개처럼 반원형으로 광장을 품고 있고, 작은 보트들이 다닐 수 있는 운하가 중세시절 해자처럼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1929년 만국박람회 유치 기념으로 마리아 루이사공원 안에 지어진 이 거대한 건물은 한마디로 20세기 초 '해골만 남은 거인'이라고 조롱받던 스페인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몸부림이자 자존심 같다. 180도 반원형의 긴 회랑으로 이어진 건물 전체를 우리의 폰카로는 도저히 다 담을 수가 없다.
건물로 가기 위해선 운하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타일 장식의 아치형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 난간에서 남미 원주민이 께나를 불고 있다. 마치 한 때 해가 지지 않던 스페인제국의 화려한 영광을 상기시키려는 것처럼. 반원형 건물의 벽면 곳곳에 특이하게도 모자익 타일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회랑 하단에는 무려 50개가 넘는 부스에 모자익 타일이 그림처럼 장치되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 타일그림들은 스페인의 화려했던 역사의 주요 장면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것이란다.
건물 외벽과 광장 벤치, 다리 난간 등 광장 도처에 유달리 타일 장식이 많은 것은 세비야의 유명한 도기타일을 자랑하기 위함일 게다. 대성당에 걸려있는, 세비야의 수호성인 유스 타와 루피나 두 자매의 순교 이야기(두 자매는 세비야의 도자기 업자의 딸들인데 13세기 이슬람교도의 축제용 도자기 그릇 주문을 우상숭배라고 거절한 탓에 죽임을 당했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비야는 예부터 도기와 타일로 유명한 도시였다.
광장을 바라다보며 기다란 건물 회랑을 걸어보기도 하고 상층 계단도 올라 보는데 그 기분이 내겐 특별하다. 바로 이 건물 회랑과 계단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로렌스가 걷던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년에도 요르단의 와디람 사막에서 로렌스를 만났는데 세비야에서는 스페인광장과 알카사르, 빌라도의 집과 아메리카 광장들이 영국군의 이집트 중동사령부 건물들로 로케이션 되었다. 이처럼 곳곳에서 로렌스를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은 세비야여행의 보너스렸다!
영국군 중동사령부(?) 회랑에서 내려다보는 마리아 루이자 공원의 울창한 숲과 시원한 분수, 그 앞에서 재잘대는 소녀들의 모습은 한 장의 그림 같은 스페인광장의 여유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스페인광장에서 나와 천천히 걸어서 산타 쿠르즈지역으로 이동한다. 산타 쿠르즈는 중세시대 유태인 거주지역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길도 좁고 미로 같아 찾아다니기도 힘들고 코르도바 유대인거리에 비해 그다지 볼거리도 없는 것 같아 중도 포기하고 일찍 숙소로 돌아가 쉬기로 한다.
스페인에 왔는데 풀라밍고 춤을 안 볼 수야 없지. 우리는 4시쯤 숙소를 다시 나와 수소문하여 한 플라밍고 공연장을 찾는다. 2시간짜리 공연은 좀 지루할 것 같아 1시간짜리로 티켓팅한다. 오래된 건물 파티오를 개조하여 만든 공연무대는 낮 시간인데도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하다. 공연 중에는 사진도 못 찍게 한다. 무희들은 다들 늙어 50대 중반은 되어 보인다. 그래도 동작들은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탭 댄스를 출 때는 수십 년 프로의 관록이 묻어 있다. 집시의 춤답게 매우 열정적이고 때로는 선정적이기도 하지만 재미있어 1시간이 금방 가는 것 같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세비야는 오페라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도시이다.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만 해도 무려 15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 '세비야의 이발사', '카르멘', '돈조반니' 등의 막장 드라마의 무대가 된 도시 아닌가? 하지만 이 많은 오페라 작품 중 스페인 작곡가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플라밍고 극장은 수없이 많은데 세비야에는 오페라 전용극장 하나 제대로 없다.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