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의 상징, 트레치메에서 걷기 연습부터
돌로미티(Dolomiti)는 서울시 면적의 약 26배에 달하는 넓은 지역이다. 동서의 길이만 해도 150km, 남북은 60km에 달하고 그 안에 수많은 기암괴석 산군들이 있다. 보통 서부 쪽 관문은 볼차노(Bolzano)나 오르티세이(Ortisei)이고, 동부 쪽 관문은 도비아코(Dobbiaco) 아니면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이다. 돌로미티에서 가장 유명한 장거리 트레일인 알타비아(Alta Via)를 걷거나, 돌로미티 최고의 관광명소인 트레치메(Tre Cime)로 갈려면 코르티나 담베초보다는 도비아코에 숙소를 잡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하다. 코르티나 담페초는 2026년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유명한 관광지로 사람들로 붐비고 숙박비도 비싸다. 반면에 도비아코는 비교적 한적하고 고즈넉한 산골마을이다. 철도도, 버스도 다 쉽게 이용할 수 있어 우리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여행객이라면 훨씬 더 편리한 위치이다. 게다가 주위에 티롤 알프스가 숨겨 놓은 보석 같은 작은 마을들도 많고 숙박비도 비교적 저렴하다.
이탈리아에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시칠리아 등 유명 관광명소들이 수없이 많은데, 최근 가장 뜨겁게(?) 떠오르는 여행지는 단연 이곳 돌로미티(Dolomiti)이다. 왜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번잡한 관광지에 식상한 사람들이나 피곤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복잡한 관광지보다는 돌로미티의 엄청난 풍광과 대자연 속에서 힐링과 재충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알프스에는 몽블랑, 마테호른, 융프라우 등 유명한 산들과 그림 같은 관광지역들이 많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몽블랑 둘레길(TMB)과 돌로미티의 롤러코스터 트레일(RCT)을 직접 걸어본 나의 경험으로는 어디가 더 좋으냐? 가 아니라 단지 느낌의 차이일 뿐이다. 알프스의 고산 준봉들은 늘 만년설로 덮여있고 장대하고 수려하다. 반면 돌로미티는 좀처럼 보기 드문 울퉁불퉁 기묘한 형상의 백운암 바위산들이다. 황량하고 거칠고 야성적이며 때론 악마 같은 느낌도 든다. 어떤 사람은 '스위스 알프스가 디즈니랜드의 테마파크라면, 돌로미티는 어드벤처이다.'라고 비유하면서, '잘 갖추어진 곳에서 관광을 하려면 스위스로, 진정한 트레킹을 하려면 돌로미티로 가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돌로미티를 <악마가 사랑한 천국>이라고 표현하고,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돌로미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건축물'이라고 말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등산가 라인홀트 매스너(Reinhold Messner)도 "자유가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가? 마는 나는 우리 등산가들이 그 자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자유는 바로 지상 천국 돌로미티이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막상 돌로미티를 걸어본 다음에야 이 찬사들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4년 전 혼자 걸었던 돌로미티 롤러코스터 트레일(RCM)은 서쪽의 세체다(Seceda)에서 출발하여 동쪽의 트레 치메(Tre Cime)까지 이르는 일주일 정도 걸리는 장거리 동서횡단 트레일이다. 또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는 여러 개의 유명한 알타비아(Alta Via) 트레킹 코스도 있다. 사실 이런 트레일을 힘들게 걸을 때 비로소 돌로미티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다. 어느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말도 안 돼! 뭐 이런데가 다 있어! 이런 풍경을 보는 순간을 위해 인생을 산다.'
그렇지만 고맙게도 돌로미티에는 길고 짧은 수많은 트레일들이 있어 꼭 장거리를 걷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여행자들의 일정, 체력 등 형편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나는 이번 여행에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1~2시간 정도 가볍게 하이킹할 수 있는 곳을 아내와 함께 찾아갈 예정이다.
어제 들린 도비아코 관광안내소에서는 도비아코에서 대중교통으로 1~2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4개의 트레킹 코스를 버스운행 시간표와 함께 친절히 추천해 주었다. 트레치메(Tre Cime)와 브라이에스(Braies) 호수, 그리고 피아자 평원(Prato Piazza)과 피스칼리나(Val Fiscalina) 계곡. 당연히 돌로미티의 상징 트레치메가 1순위이지만 우리는 오늘 돌로미티의 첫날이라 가볍게 브라이에스(Braies) 호수부터 구경하기로 한다.
호스텔의 아침을 먹고 어제 미리 답사한 도비아코 버스 종점으로 향한다. 천천히 도비아코 시내를 구경하며 20여분을 걸어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그런데 브라이에스(Braies) 호수행 442번 버스는 빈자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온라인으로 예약하지 않으면 탈 수 없단다. 헐! 언제부터 이탈리아가 디지털 대중교통 국가가 되었지? 아직도 지하철이나 시내버스에서 검표원이 불시에 나타나 무임 탑승자를 단속하는 나라에서. 아무리 직원에게 사정해도 안된다고 한다. 그런데다 우리 둘의 스마트폰은 로밍도 유심도 안 되어 있으니 무용지물이다. 우리는 숙소의 와이파이만 이용해도 충분해 여행 중 로밍을 해본 적이 없다.
할 수 없이 아내를 근처의 야외 카페에 잠시 쉬게 하고 와이파이 되는 곳을 찾아 나 혼자 나선다. 숙소까지는 너무 멀고 길가의 호텔 한 군데에 들려 양해를 구하고 호텔 와이파이를 이용하는데 이번에는 카드 결제가 안 된다(인증번호를 몰라서). 아! 불쌍한 아날로그 세대여! 10여 분 넘게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가는 수밖에. 여행 첫날부터 김 빠지는 소리가 푹푹 난다. 그런데 돌아가는 도중에 뜻밖에 역 앞 간이 매표소에서 트레치메 행 버스표를 팔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얼씨구! 하고 행선지를 바꿔 12시 무렵 트레치메 행 444번 버스에 오른다.
오늘따라 날씨는 화창하고 버스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티롤 알프스의 정경은 하나하나가 그림이다. 444번 버스는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승객들의 탄성을 치르게 한 채 1시간 만에 돌로미티의 상징이자 관광 1번지 트레 치메(Tre Cime,3개의 봉우리) 입구인 아론조(Aronzo) 산장 주차장에 내려준다.
아내와 나는 천천히 101번 길을 따라 걷는다. 다행히(?) 성수기가 지난 9월 중순이라 그런지 관광객은 많지 않다. 우리는 사진도 찍고 길가의 미니 교회 근처에서 준비해 온 점심도 먹으면서 여유롭게 라바레도(Lavaredo, 2,344m) 산장까지 1시간 정도 걷는다. 라바레도 산장까지는 평탄한 길이라 무릎이 좋지 않은 아내도 무리 없이 즐겁게 잘 걷는다. 잘 걷는 정도가 아니라 오랜만에 소풍 나온 소녀처럼 발걸음이 가뿐가뿐하다.
3개의 거대한 백운암 봉우리(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 2,999m)로 이루어진 트레치메(Tre Cime)는 돌로미티의 랜드마크이자 접근성이 좋아 누구나 쉽게 와 볼 수 있다. 하지만 트레치메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다.
라바레도 산장도 트레치메 바로 밑이라 그 유명한 트레치메를 올려다볼 수 있다. 하지만 트레치메를 제대로 조망하려면 1시간 정도 더 걸어 로카텔리(Locatelli, 2,405m) 산장까지 가야 한다.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별로 어렵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매우 미끄러운 마사토 내리막길은 무릎이 좋지 않은 아내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럽다. 게다가 로카텔리 산장까지 1시간을 더 가면 왕복 4시간 거리인데 첫날부터 이건 너무 무리이다. 아내는 아쉬워하지만 첫날인 오늘은 걷기 연습을 한 걸로 하고 라바레도 산장 부근에서 충분히 쉰 후 돌아기기로 한다.
우리는 라바레도 산장 부근에서 차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충분히 돌로미티의 첫날을 만끽한다. 오늘따라 너무나 화창한 하늘 아래 트레치메 상공을 나르는 페어 글라이더와 주변의 엄청난 풍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하루이다. 우리는 버스로 숙소로 일찍 돌아와 와인 한 잔을 곁들인 호스텔의 푸짐한 저녁으로 돌로미티의 첫날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