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파타고니아 - 피츠로이&세로토레

파타고니아가 내게 준 선물

by 남쪽나라



여유로웠던 모레노 빙하 투어를 마치고 짐을 챙겨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엘 찰텐(El Chalten) 행 오후 5시 30분 버스를 탄다. 중간에 잠시 들린 간이휴게소 앞에 서울 17,231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내가 정말 멀리도 오긴 왔구나. 엘 찰텐은 아르헨티나 빙하 국립공원 내에 있는 상주인구 겨우 350명 정도의 아주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피츠로이(Fitzroy)와 세로토레(Cerro Torre) 트레킹의 베이스캠프로 유명한 곳이다. 이왕 파타고니아에 고생스럽게 왔는데 이 유명하다는 트레킹 코스를 안 걸어 보고 갈 수야 없지.


엘 찬텐 첫째 날

나는 피츠로이가 대단히 유명한 산인지 몰랐다. 내가 파타고니아에 오기 전까지 그나마 이름이라도 들어 본 것은 세로토레와 모래나 빙하 정도였으니까. 호스텔에서 불과 몇 분을 걸으니 피츠로이( Fitzroy) 트레일의 입구가 나온다. 목축의 나라 아르헨티나답게 서부영화에서나 보던 목장 입구 모양인데 벌써 가벼운 등반 차림의 트레커들이 앞서 걸어가고 있다. 날씨를 걱정했는데 오늘도 트레킹 하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날씨이다. 피츠로이는 아무한테나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로 유명한데 오늘도 <초행자의 행운>을 기대해 본다.


등산로 입구를 지나 1시간 20분 정도 완만한 경사와 숲길을 따라 천천히 기분 좋게 걷다 보니 죽은 나무들과 돌더미들 너머로 불쑥 피츠로이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날아갈 듯 가벼운 구름 잠옷을 걸치고. 청명한 하늘과 검초록색 산들 사이로 하얀 눈 이불을 두른 듯한 피츠로이의 웅자. 신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준다는 피츠로이가 한국서 온 시골 영감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환영하고 있지 않은가? 감동이다.


피츠로이로 향하는 길의 무릉도원 같은 풍경

다시 길을 따라 피츠로이를 마주 보며 걷는데 마치 무릉도원을 걷는 기분이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듯한 숲들과 나지막한 관목들, 스텝과 빙하물이 흐르는 계곡, 그리고 곳곳에 보이는 붉은 머리 딱따구리. 하늘은 더없이 청명하고 봄볕은 따사하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인간세상이 아닌 별세계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지으신 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2시간여 동안 인적이 없는 길을 홀로 걷고 또 걷지만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러다가 9/10라는 길 표시가 나타난다. 10 km 중 9km까지 왔다는 표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마지막 1km의 오르막은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3봉의 오르막 못지않게 경사지고 미끄럽다.


조심 또 조심 스틱 하나에 의지하여 천천히 오르다 보니 드디어 로스 트레스 호수(Laguna de los tres)가 발아래 나타난다. 호수는 아직도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고 날카로운 상어이빨을 한 그 피츠로이가 수줍은 색시처럼 엷은 구름옷을 살짝 걸치고 나를 내려다보고 손을 흔들고 있다. 일순간 엷은 구름이 암봉을 살짝 가리기도 하지만, 피츠로이를 이 정도로 선명하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다.


장대한 피츠로이 산

거대한 빙하들 위로 우뚝 솟은 3,405m 높이의 거대한 화강암 침봉 피츠로이(Fitzroy), 흔히 남반부의 마테호른이라고 불리는 피츠로이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벅차다. 30여 분간 그저 멍하니 서서 시시각각 변하는 그 모습을 그저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엘 찰텐 둘째 날

오늘은 내가 헤어조크 감독의 영화 <세로토레>를 보고 알게 된 바로 그 세로토레를 찾아가는 날이다. 오늘도 너무나 감사하게 <초행자의 행운>은 계속된다. 하늘은 더없이 청명하고 구름 한 점 없다. 세로토레를 오르는 트레일은 칠레의 토레스 삼봉이나 어제 오른 피츠로이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이다. 거리도 얼마 안 되고 별다른 깔닥고개도 없다. 하지만 호수에 이르는 한 시간 반 정도의 길은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세로토레와 피츠로이는 불과 5km 떨어져 있다. 조금 높은 지대에서는 파타고니아 최고의 명산 두 개가 형님 아우처럼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는 듯 한눈에 다 들어온다.


세로토레와 피츠로이 산

관목 숲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 시원하게 펼쳐진 널따란 초원에선 눈앞에 아침 햇살에 너무도 선연한 세로토레가 계속 나를 손짓하고 있다. 더 할 수 없이 완벽한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혹시라도 구름에 가려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조바심에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데 어제의 피츠로이 깔딱 고개에 비하면 오르막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낮은 언덕을 오르니 바로 토레(Torre) 호수다. 3시간 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죽기 전에 제게 이런 길을 걷게 해 주셔서!' 하는 말이 수없이 나온다.


세로토레를 바라보고 걷는 길

Fantastico! 환상적이다! 호수 위에 송곳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세로토레(Cerro Torre). Cerro는 산이고 Torre는 탑을 의미하니 'Cerro Torre는' 탑 모양의 산'이란 뜻이란다. 하늘을 향한 포효가 그대로 돌이 된 듯 새파란 하늘을 향해 마치 찌를 듯한 자세다. 누군가 '세로토레는 산이 아니고 공포이다'라고 했고 ' 오르기 불가능한 산'이라고 했다. 해발고도 3,128m, 빙하가 깎아낸 화강암 봉우리의 높이만 1,227m. 보기와는 달리 세로토레는 일 년 열두 달 80~90도의 수직 화강암 표면이 얼음으로 덮여 있고 파타고니아의 엄청난 바람과 폭풍설 때문에 사람이 오르기 불가능한 산이라고 여겨졌다. 물론 등반가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마침내 올랐지만.


세로토레 앞에서

영화를 보면서 잠시 가져본, 막연하고 실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해 보이던 그 작은 꿈이 오늘 이루어진 것이다. 70이 넘은 나이에! 더구나 날씨의 행운까지 더해 이런 완벽한 세로토레를 만나다니 정말 감격이다.


우연히 무모하게 시작된 나의 파타고니아 여행은 내 인생에 크나 큰 선물이자 전환점이 되었다. 운동이라고는 평생 별로 해본 적이 없고 학교나 직장에서 평범한 범생(?)으로 살아온 70대 노인에게 미쳐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넓은 세상과 대자연을 접하게 해 주었고, 그곳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을 넓혀주었다. 또한 나이가 들어도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꿈꿀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세상에 걷기만큼 쉽고 즐거운 일이 또 있으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있지 않은가? 파타고니아는 나를 걷기 여행자로 만들었다. 그 이후 나는 히말라야를 비롯해 세계 10여 개의 유명 트레일을 혼자 걸었고 그 과정과 즐거움을 담은 내용의 책<나의 세계 트레킹 이야기>도 발간하였다. 무력하게 하루하루를 '소일'하던 노인네가 아마추어 트레커가 되고 여행작가가 된 것이다. 이 모두 파타고니아가 내게 준 크나 큰 선물이다.


PS: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이어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금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 2>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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