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석탑은 밤늦게까지 비눗방울 했던 곳이잖아, 당연히 알지. 거기에 킥보드를 안 가져가서 진짜 아쉬웠어"
"부여 정림사지? 아빠의 전생(아낙네) 맞춘데? 그 기계 진짜 대박인데 ㅋㅋㅋ"
"경복궁 보다는 그 앞 광화문 광장이 더 멋있지. 세종대왕이랑 이순신 동상 있잖아. 근데 그거 기억나? 거기 지하에 있던 서점에 만화책이랑 장난감이랑 학용품 엄청 많았잖아. 아, 거기 가서 또 사고 싶다."
그렇다, 우리 집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온몸으로 역사를 경험했다. 엄마가 열성적이라서? 부지런해서? 다 틀렸다. 어쩌다보니 집순이가 주말마다 나가고 있는지 나도 아이러니하다.
이젠 너덜너덜해진 여행지도
초등 5학년 2학기 사회시간에 한국사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첫째(1호)가 4학년을 준비하는 겨울방학부터 장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물론 엄마만의 계획이다.) 첫 시작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주야장천 들어서 1절은 기가 막히게 알지만 2절, 3절이 되면서 이게 맞나? 하고 헷갈리는 애국가 사촌 같은 그 노래를 BGM으로 틈이 날 때마다 틀어줬다. SNS에서 한국사 영재를 둔 엄마가 그러라 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면 관심이 생긴 것이니 그때부터 한국사를 달리라 했기에 전집구입과 EBS 회원가입까지 다 해두고 그날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역사는 흐른다~" 마지막 한 마디를 은연중에 부르기 시작했다.
좋았어, 지금이야!
이제나 저제나 노래를 부르기만을 기다렸기에 부리나케 가사 속 인물들과 관련된 영상, 책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너무 급했을까, 아이는 안 좋아했다. 손톱만큼 있던 관심도 사라졌는지 노래조차 부르지 않는다. 엄마가 좋아하는 척 한국사 관련 영상 보고 억지로 웃는 게 느껴진 건가? TV를 켜는 순간 관심을 가지지만 정조가 어쩌고, 사림파가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방으로 가서 형제의 난을 벌인다. 평소에 알아서 읽으라던 책도 큰맘 먹고 읽어 주려 위인전을 꺼내면,
"엄마, 그거 말고 이거 읽어줘"
하며 수백 번 읽은 동화책을 가져온다. 그럼 그렇지, 육아가 내 계획대로 굴러가면 그게 육아겠니. 그럼 금쪽이가 왜 있고, 오은영 박사가 왜 유명해졌겠어.
포기는 배추 셀 때만 쓰는 거랬다. 40년째 한국땅에서 살아보니 뭐만 하면 한국사랑 영어는 필수로 시험을 보더라. 모르긴 몰라도 중요한 건 맞는 것 같다. 당장 5학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수능까지 '한국사'라고 떡하니 독립된 과목으로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다 싶다. 공부 꽤나 한 전문가들이 본인들이 잘 아는 거라고 넣어놨을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학습전략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고심과 검색 끝에 내 아이의 취향에 맞는 체험하는 한국사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처음 시작인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는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부분이었기에 자신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인물과 사건이 엉키는 많이 부족한 엄마다.) 구석기 박물관에 가서 직접 돌을 갈고 쌓다가 지푸라기와 나무젓가락으로 움집도 만들고, 금은박지로 청동액세서리를 만들어 대장놀이를 했다. 함께 놀이를 해서인지 아이도, 나도 재미있었다. (요즘 박물관은 어린이관이 따로 있는 곳도 많고, 체험하는 곳도 많더라.)
문제는 그다음시대부터다. 어디를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가 안 잡힌다. 역알못 엄마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한국사는 아들이 배워야 하는데 한국사책은 어미인 나만 펼쳐서 열심히 읽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대박, 자격루 정말 신기한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세종이 장영실 예뻐할 만하네.'
아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자료조사는 어느새 나의 지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게 일거양득인가? 아무튼, 매주 하나씩 교재로 사둔 <역사탐험대>를 목차 삼아 열심히 찾아다니고, 다녀와서 기록을 남기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아들을 꼬셔 기록을 대신할 <만공 한국사>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삼국이 고려시대가 되고, 조선시대가 되더니 일제강점기까지 오더라. 쉽지 많은 않았다. 생각보다 한국 땅은 넓었고, 갈수록 디테일한 내용에 나도, 아이도 지치기 일쑤였다.
아이들과 했던 활동 기록 중 일부를 블로그에 저장해 두었다.
현대사까지 오는데만 3년이 걸렸다. 예상보다 너무 길어진 프로젝트가 되어 어느새 1호는 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동안 한 게 있으니, 다 알고 있겠지?'
라고 뿌듯한 마음으로 당당하게 학교를 보냈다. 사회시간에 아이가 체험하고 알게 된 것을 마음껏 뽐내고 오길 바랐다. 늘 그래왔듯 육아 겸 교육은 나에게 로또다.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 있을까? 아이의 반응은 또 보기에 없는 데서 나온다.
"엄마, 오늘 한국 시간에 수원화성 배웠다? 엄마 거기 알지? 나 거기서 개구리 인형 샀잖아. 내가 그 얘기를 수업시간에 했더니, 친구들이 개구리 왕눈이냐며 묻더라. 다 같이 개구리 왕눈이 노래도 불렀어."
아, 신이시여. 저에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난 또 마음속으로 선생님께 사죄의 편지를 쓴다.
'선생님, 제가 이러려고 열심히 데리고 다닌 거 진짜 아니거든요. 제 배 아파 낳은 놈이지만, 저도 이 녀석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 딴에는 한다고 하는데 이게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네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런가 봐요. 제대로 알려주면서 다녔어야 하는데... 수업하시기 정말 힘드시죠? 정말 죄송합니다. '
담임 선생님은 내 마음의 편지를 받으셨는지 1호가 경험이 많아서 수업시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해 준다며, 덕분에 아이들이 재미있게 한국사 수업을 하고 있어 큰 도움이 된다고 상담 때 말씀해 주셨다. 에둘러 좋게 표현해 주신 것 알지만, 그럼에도 그 말에 위안을 해보며 어미는 다시 여행 사진과 전시된 작품을 꺼내 설명을 해 본다.
"여기 이 사진, 기억 안 나? 이거 직접 돌려서 커다란 바위 올려봤잖아. 그래, 그게 거중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