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2호)가 울부짖는다. 퍽이나 억울한가 보다. 순간 당황해서 너는 학생이지 않냐며, 엄마도 어렸을 때 다 했었다고 머리를 거치지 않은 채로 변명을 잔뜩 늘어놓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화자도 청자도 알지 못하는 단지 허공에 떠도는 소음 중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2호는 엄마가 그러는 게 일상이 되어 익숙한가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듣는 둥 마는 둥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책상 위에 놓인 노트에 머리를 붙이고 엎드리듯 앉는다. 공부하기 싫어서 꾀부리고, 미루다 결국 한 소리 듣고 앉았으니 얼마나 더 하기 싫을까.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공부습관을 만들어놔야 한다는 책임감에 오늘도 모르는 척 바라만 본다. 연필로 꾹꾹 눌러 글을 쓴다. 지우개도 평소보다 세게 빡빡 문지른다. 종이가 찢어지고, 연필심이 부러지는 걸로 화를 풀 작정인가 보다. 씩씩 거리는 모습에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라며 잔소리 한 바가지를 더 부울까 하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애써 눌러 담으며 화를 삭일 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누굴 위한 공부인가. 이게 맞는 건가. 매 번 이러는 게 나의 문제일까, 너의 문제일까. 우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매 번 같은 질문인데도 수년째 답을 못 찾고 있다. (답을 아시는 분, 댓글로...) 1~2년 전만 해도 글자를 하나만 써도 사진을 찍고 가족모두에게 보여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칭찬해 주었는데, 요즘은 맞춤법 하나 틀렸다고 지적하기 바빴다. 학년이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 하라고 채찍질을 했던 것 같다. 뭣이 그리 중하다고. 화가 누그러지면서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오늘 아침에도 '엄마의 소신'을 읽으며 흔들리지 말고 아이만을 생각하자고 다짐했건만 또 한순간에 무너졌다. 오늘 밤엔 반성문이라 생각하고 필사를 좀 해야겠다.
"엄마도 같이 할게. 뭐를 같이 하면 좋을까?"
"진짜? 나 지금 독후감 쓸 거니까 엄마도 써."
"그래. 다 쓰고 서로 바꿔 읽자."
아이에게 미안함을 에둘러 표현하자 울상이던 아이의 얼굴이 환해진다. 이게 뭐라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초3 공부면 어려운 것도 아닐 텐데 진작 같이할걸 괜한 아이 속만 태웠다는 생각이 들어 민망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미안하다, 아들아. 엄마가 아직 어른이 덜 되어서 감정조절이 안되나 봐. 좀 더 노력해 볼게.
나이 들면서 괜한 자존심만 세져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는 사과를 마음으로 새기며 노트를 꺼내 들었다.
'독후감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독후감의 정석을 보여줘야지.'
책상 앞에 앉는 순간, 서평 꽤나 써 본 사람처럼 어깨에 뽕이 한껏 올라갔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보여줄 건 보여주겠다는 심산이다. 초등학생 때(30년 전이네, 아 옛날이여~) 독후감으로 상장 좀 받아 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는 누워서 발로도 쓸 수 있다며 호기롭게 펜을 들었다. 1분. 딱 거기까지였다. 나의 자신감이 유지되는 시간은.
'뭐라고 써야 하지? 뭘 쓰지?'
말도 안 되는 질문만 머릿속을 맴돈다. 뭐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첫 문장부터 막히다니, 말이 안 된다. 나름 독서를 한답시고 도서관이며 서점을 열심히 들락 거리는 게 일상인 사람, 작가를 꿈꾸며 블로그며 브런치며 열심히 끄적이는 사람. 그게 바로 나란 말이다. 그동안 읽을 책에 대한 나의 느낌과 생각을 쓰는 게 어려울 수가 없다. 책을 읽게 된 동기, 간단한 줄거리, 감명 깊게 느낀 부분을 통해 나의 생각이나 경험 쓰기. 그리고 마지막은 훈훈하게 다짐이나 결론. 이렇게 독후감의 개요까지 다 알고 있는데 왜, 무엇 때문에, 뭐가 어려워서, 5분째 멍하니 한 글자도 못쓰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이는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열심히도 끄적인다. 동화책보다 소설책이 글자는 몇 배로 많을 건데, 대체 왜 쓸거리가 없을까. 기억이 나는 것도 아니고 안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다 하다 이제 자아를 찾으려는 철학 세계까지 생각이 뻗어나갔다. 정신 차려야 한다. 체면을 차리려면 어떻게라도 글을 써야 하기에 다시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엄마, 다 썼어?"
"아니, 아직."
"아직도? 난 다 썼는데?"
"벌써? 어디 봐."
또 '나는~책을 읽었다. 여기에는 ~가 나와서 ~을 한다. 참 재미있었다'로 썼겠지 싶어 다음 멘트를 목구멍까지 올려놓고 노트를 집어 들었다.
2호는 독후감 고수였다. 독후감을 그동안 허투루 쓴 게 아니었나 보다. 이 짧은 시간에 한쪽을 다 채우다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그렇게 어설프고 부족해 보였던 독후감이 오늘따라 유독 완벽해 보인다. 하려고 준비해 둔 말은 어느새 쑥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우와~ 진짜 잘 썼네. 어떻게 이렇게 쓸 수가 있어? 엄마는 이제 한 글자 쓰려고 했는데."
"뭐야, 정말 하나도 안 썼어? 나 쓸 때동안 뭐 하고 있었어? 글 안 쓰고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지? 빨리 써서 나 보여줘. 알았지?"
2호는 당당하게 거실로 나갔고, 나는 아이 책상에 덩그러니 앉아 연필만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독후감, 이거 어려운 거네.
사진: Unsplash의Alvaro Reyes
Tip) 글쓰기 교재 추천
우리집은 이 교재 중에서 하나씩 아이가 골라서 주1회 꾸준히 하는 중이다. 현재 초5는 논술쓰기, 초3은 생각글쓰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