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 Nov 23. 2023

당신은 어른입니까?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 김수현

주말 동안 독박 육아를 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지친 나를 위해 힐링선물로 미용실을 예약하기로 마음먹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자꾸 우울해지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해서 기분도 바꿀 겸 안 하던 걸 해볼 참이다. 화장도 짙게 해 보고, 네일도 받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리라.(화장 지우는 건 아직도 제일 귀찮은 건 안 비밀) 나에게 돈을 쓰는 게 세상에서 가장 아까웠던 아줌마였는데, 아직 20대 아가씨 때 여자여자했던 감성이 남아있었나 보다. 벌써부터 설렌다. 이번 기회에 활기와 긍정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가꾸는 투자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가장 응급처치가 필요해 보이는 미용실을 1순위로 정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서 두피가 휑하니 보이고, 머리카락은 실보다 얇아졌지만 이왕 하는 거 과감하게 앞머리도 내보고, 파마와 염색, 클리닉까지 다 해볼까 한다. 이 투자가 과연 내가 원하는 효과를 얼마나 발휘할지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미용실 대기실 전면 책꽂이에는 여성(이라 하고 주부라 읽는다) 잡지가 매 월별로 놓여있다. 오랜만의 방문인데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책꽂이 모습에 옛날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오랜만에 잡지나 볼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위쪽 선반에는 다양한 카테고리의 책들이 나란히 꽂혀있는 게 보인다. 책등에 적힌 제목들을 쭉 살펴보는데 그중 흰색과 검은색으로 명암이 뚜렷한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라는 책이 눈에 띈다.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몇 번 보았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괜히 손이 가지 않아서 집에 데려오지 못한 책이다. 안 봤지만 낯익은 책아, 오늘은 너로 정했다.

미용실에서 보내는 시간 내내 열심히 읽어댔다. 제목만 봐서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바탕으로 쓰인 자기 계발서라고 생각이 드는데,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접근을 한 내용이라 더 구미가 당긴다.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 20대들에게 응원과 조언을 적은 책이기에  40대인 나는 작가의 글에 동의도 하고, 나는 그들이 그리는 어른의 모습이 되었는지 평가도 해 보며 글을 읽기 시작한다. 작가는 20대 청년들에게 어른스러움을 갖추기 위해 아래의 세 가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드러운 말투에서 느껴지는 여유.

뚜렷한 신념.

깊은 배려심과 높은 자존감.


 첫마디인 '부드러운'부터 난제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누구에게나,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로 말하는 것. 머리로는 알겠으나 입으로는 꺼내기 쉽지 않다.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지만 가족에게 특히 그러하다. 편하다는 이유로, 내가 믿는 나의 사람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부정적인 감정을 너무나 쉽게 표정과 언어, 행동으로 표현하다 보니 부드럽기는커녕 거칠고 날카롭기 일쑤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한테는 잘도 하면서 50년을 함께 할 소중한 가족에게는 왜 안되는지 모르겠다. 다른 집처럼 존대를 해면 나아지려나, 아니면 남처럼 살아야 하나.

 어떻게든 부드러운 말투를 장착해 보아야겠다며 다음으로 넘어가 본다.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또 눈에 걸리는 단어가 있다. '여유'다. 나에게 여유는 사치와 동의어다. 성인이 되는 20대는 직장 찾으랴, 직장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 놀아보겠다고 이직할 때마다 받은 퇴직금으로 여행 다녔던 게 지금도 사골처럼 툭하면 꺼내어 보는 추억팔이 소스고 그게 내 인생 유일한 여유다. 어영부영 맞이한 30대가 되면서는 그 꿀 같은 잠깐의 여유도 사라졌다. 회사는 자리 잡아 조금 편해졌을지 모르지만, 결혼과 육아라는 복병이 나타나 집이 또 다른 일터가 되었다. 툭하면 아이 살피느라 불침번을 섰고, 주말은 양쪽집 행사와 아이에게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런 삶 속에서 여유를 찾고자 취미 생활을 하려 하면 그 돈이면 아이 장난감 하나, 남편 옷 하나 사는 게 낫다는 생각에 접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그 싫던 회식이, 모임이 좋아지고 기다려졌다. 40대는 아이가 크면서 숨을 쉴 틈이 그나마 생겼다. 경조사도 많이 줄고, 양가의 행사도 조율할 수 있는 능청이 생겼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보니 아이가 커서 생긴 것도 있지만, 이제 내가 가정을 꾸려나가며 일을 하는 삶이 익숙해져서 틈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사실 친구들과 수다 떨 시간이 있었고, 동네 아줌마들과 맥주 한 잔 할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난 시간들이 많이 아쉽다. 20대 때 좀 더 많이 놀러 다니고, 연애도 더 많이 해 볼걸. 30대 때 아이한테만 매달려 있지 말고 한 번씩 약속도 잡고, 혼자 문화생활도 할걸 그랬다. 생각해 보니, 여유라는 건 가만히 있어도 생기는 게 아니다. 알아서 챙기는 거지.

 예전 <태양의 후예>에서 유시진(송중기 역할)이 그랬다. 아이와 여자와 노인은 보호해야 한다고. 크~ 지금 생각해도 멋있다. 그 대사가 그의 신념을 짧고 굵게 나타내주어 더 멋지게 느껴졌다. 휴머니즘이 강한 사람이었던 그는 생사를 오고 가는 상황에서 본인의 신념대로 정의롭고 지혜롭게 그리고 분명하게 판단을 했다. 그의 신념으로 여자친구를 구해서 멋있었고, 동료들과 함께하다가도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모습이 어른다웠다. 그런 신념은 유시진만 갖는 게 아니라 어른이라면 응당 하나쯤은 있어야 하나보다. 그렇다면 나의 신념은 뭘까? 아이에게 어떤 점을 강조하며 키우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며 신념이란 것을 찾아본다. 남편과 나는 언제 어디서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걸 싫어한다. 그냥 내가 혹은 우리가 조금 불편하고 손해 보는 게 속 편하다. 또 반대로 요구사항이나 건의사항이 있을 때는 주저 없이 얘기한다. 그런 점을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면, 뭐가 될 수 있을까. '배려는 하되 호구는 되지 말자' 정도면 되려나. (부드러운 말투는 대체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겠다.) 신념을 갑자기 만들어 내는 건 어려우니, 살면서 의식적으로 내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무엇을 중시하는지 찾아보는 걸로 자체적 합의를 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 본다.

 자존감과 자신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쌍둥이 형제 느낌이다. 자신감이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한 주관적인 믿음이라면 자존감은 능력에 관계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있는 능력에 없는 능력까지 덧붙여서 믿음을 많이도 만들면서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영역을 넓히지 못하는 걸까. 능력을 키우는 건 어렵고 자신을 사랑하는 건 쉬운 건데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작가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성인답게, 엄마답게, 학부모답게, 손님답게, 국민답게.. 매 순간 정해지는 내 캐릭터들의 역할을 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아직 어른이 덜 되었다는 말을 부드럽게 표현해본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악을 비롯한 다양한 힘들을 적절히 조절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안팎에 널려있는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상대를 보호하면서 세상을 좀 더 재미있고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ㅡ김혜남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즐기는 개구리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