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엄마의 생신이 며칠 뒤라서 동생네와 방학 첫날을 함께 하게 되었다. 6살 조카가 형아들을 보기 위해 3시간 거리를 쉬지도 않고 달려왔단다. 조카와 우리 아이들은 남자아이들이라서 만나면 하향평준하가 되어 뽀로로와 옥토넛을 보며, 똥과 방귀 얘기로 하루종일 웃으며 뛰어노느라 바쁘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있는 동성이라 조카카 유독 우리 아이들을 좋아한다. 우리 아이들도 조카가 오는 날은 엄마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놀 수 있으니 좋아하는 눈치다. 그래서 기왕 모이게 되면 아이들이 신나게 놀 수 있게 장소를 마련하곤 하는데이번에도 놀이터가 있는 큰 식당으로 예약을 해 두었다. 이 정도면 엄마의 생일이 아니라 조카의 생일... 아 맞다. 조카의 생일이기도 하다. 조카와 엄마는 생일이 하루 차이다 보니 공교롭게 매번 생일을 같이 한다. 올케도 시댁에서 아들의 생일을 보내야 해서 마음이 좋지 않겠지만, 함께 하는 우리 가족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케이크만 해도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 초콜릿 케이크를 사야 하는지, 엄마가 좋아하는 생크림을 사야 하는지 살 때마다 고민이 된다. 생일 선물과 카드를 2개씩 준비해야 하는 아이들도 용돈이 갑자기 훅 나가는 바람에 이즈음이 되면 용돈통장을 보며 한숨을 쉰다. 이번에는 선물에 유치원 시절 열심히 모았던 카봇 (변신로봇 장난감)까지 물려주기로 한터라 사촌동생의 방문이 반갑지만은 않다.
"어차피 안 쓰고 창고에 두기만 할 거잖아. 버리느니 주는 게 낫지. 너 토이스토리 기억 안 나?"
그래도 1호가 좀 더 컸다고 고민하는 2호를 설득한다.
"그럼 이거만 빼고 줄게. 이건 지금도 가지고 놀 수 있으니까."
비싼 로봇이라 모으는데 한참이 걸렸고, 본인의 인생의 1/3을 함께 한 장난감이니 애착 강한 녀석이 이별을 결정하기 힘들었을 텐데 기특하기도 하고 많이 컸다는 생각에 흐뭇하기도 하다.
매 번 고민되는 케이크.
"야아~ 그거 다 주려고? 아~ 그건 좀 아닌데?"
큰맘 먹고 박스째 로봇을 모두 들고 왔는데 동생이 딴지를 건다.
"이거 로봇 해달라, 합체해 달라, 자동차로 바꿔달라 계속한단 말이야. 귀찮아 죽겠어."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하며 투덜거리는 모습에 어이가 없다. 아무리 중고라지만 최근에 시즌 13까지 나와서 개당 몇만 원씩에 팔 수 있는 걸 10개는 주는 것 같구먼. 지 아들을 위해서 내 새끼들 어르고 달래서 가져왔는데 보자마자 귀찮고, 번거로워서 싫단다. 사실 이 로봇은 조카 친구들 사이에서 서로 어떤 걸 가지고 있는지 몇 개를 가지고 있는지 경쟁이 붙어 올케가 조카한테 내 앞에서 보란 듯이 귓속말로 '고모한테 형아 카봇 안 쓰는 거 주세요라고 얘기해'라고 하길래 눈치껏 준비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저째? 저 집은 부부간 대화가 없나 보다. 당황하는 올케와 질색하는 동생, 당황한 아이들을 보며 이 상황에 화가 난 내 사이에서 조카는 너무 행복해하며 카봇을 하나 둘 꺼내 만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 조카가 좋다는데.. 둘도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조카에게 새것을 사주지도 못하는 고모라 늘 마음이 쓰였으니 행복한 너를 보며 기분 좋게 주자. 저 놈은 태생부터 지밖에 모르고, 고마운 걸 모르는 놈이었으니 무시하면 된다. '
마음속으로 아는 욕을 다 해가며 화를 삭이고는 표정관리를 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로봇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다가는 싸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인 건지 모르겠으나 올케도 조카의 행복한 표정만 보였는지 동영상을 찍어 인스타에 올려놓고 자랑을 한다.아이들도 집에 오자마자 일기를 쓰며 사촌동생에게 장난감을 물려주었는데 동생이 너무 좋아해서 아쉬웠지만 주길 잘했다며 글을 쓰는 모습에 기분이 눈 녹듯 풀린다.
너희들이 나보다 대인배구나.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작은 레고 하나씩을 선물해 주겠다고 예정에 없던 지출을 약속했다.
'그래, 잘 참았어. 조카도 좋아하고 올케도 원하는 거였잖아. 애들도 나눔을 경험하며 행복해하고... 어차피 주는 거 웃으며 줘야지. 잘 참았어.'
오늘 하루를 잘 넘어간 스스로를 토닥이며 잠자리를 준비하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good bye carbot
"야, 너 내일 뭐 하냐?"
"왜?"
"우리 딸기 체험 하러 갈 건데 같이 갈 건가 하고-"
"갑자기 무슨 딸기 체험이야?!"
"후배가 이번에 오픈했거든. 가서 체험하고 홍보해 주라고. 여기서 먼 곳 아니니까."
언제나 이런 식이였다. 본인은 미리 다 정해놓고 나는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라는 식이다. 이럴 때마다 돌아가신 아빠가 떠오른다. 항상 본인 머릿속 생각을 모두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하고는 당일에 왜 준비 안 하냐며 통보식으로 얘기해서 엄마를 당황하게 하던 아빠. 그런 아빠를 나이가 들 수록 동생이 똑같이 따라 하고 있다. 좋은 점 좀 닮지, 왜 유전은 안 좋은 것만 되는 건지 모르겠다.
딸기 체험이고 뭐고 동생과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가면 본인은 어디선가 앉아서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있을 거고 나는 그런 동생에게 잔소리를 하며 우리 아이들과 조카를 동시에 돌보고 있을게 뻔했다.
"딸기체험? 가자! 삼촌 우리 갈 수 있어요!"
아뿔싸. 이거 전화였지. 아무 생각 없이 애들과 같이 있는 곳에서 통화를 하는 바람에 다 들렸던 모양이다.
"나 내일 출근해야 해서 일찍 가야 하니까.. 8시 반쯤 출발하면 되겠다. 주소는 내가 톡으로 보낼게."
뚝. 또!또!! 지 할 말만 하고 끊는다. 아오.. 열받아. 겨우 진정시켜 놨는데 또 불을 지핀다. 애들은 놀러 간다고 신이 났고, 남편은 내가 차를 쓸 상황임을 인지하고는 눈치껏 차를 정비해 두러 슬쩍 나갔다.
'하아... 애들을 위한 거다. 방학이니 체험 하나 정도는 하는 것도 좋지 뭐... 지가 데려가는 거니 체험비는 책임질 테니 돈 값한다 생각하고 참자... 후우..'
그동안 태연스러운 얼굴과 표정으로 지내다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던 '누나니까', '여자니까', '첫째니까'의 불만과 억울함의 민낯이 올라오고 있음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