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 Jan 13. 2024

생파를 며칠째 하는 거야?!

방학 3일차

옛날 옛적에... 이름하야 20세기에 내가 활기 넘치는 인싸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는 생일 주간이라 하여 생일을 앞두고 짧게는 1주 길게는 3주까지 생파를 하느라 밤늦게 귀가를 하곤 했다. (내 생일주간이 끝나면 친구의 생일 주간인건 안 비밀 ㅎ) 어제는 직장동료, 오늘은 대학동기, 이번 주말은 고등동창, 그다음 날은 전 직장 동료.. 만날 사람 카테고리가 많아 나중에는 드라마 속 재벌집 딸처럼 지인들을 커다란 호프집을 빌려 한꺼번에 불러 모아 소개도 시켜주며 하루종일 놀아볼까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 생일이 이제는 365일 중에 하루로 무의미해졌다. 어쩌면 일 년 중 가장 귀찮아지는 날일지도 모른다. 먹기 싫어도 친정 혹은 시댁 식구들과 밥을 먹어야 하고, 무언가를 하거나 어딘가를 가기 위해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하는 과정조차 스트레스가 되는 생일이 싫어진다. 그래서 40번째 내 생일이 되던 날, 나는 가족에게 선언했다.

내 생일에는 아무도 안 만날 거야.
아무 데도 안 갈 거니 절대 약속 잡지 마.
배달만 시켜줘. 밥 하긴 싫으니까.

나이를 먹으면 다 생일에 무감각 해지는 게 국룰 아닌가? 생일의 설렘에 무뎌지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거라 여겼는데, 나만 그런가 보다. 70번째 생신을 앞둔 아버님은 고가의 선물을 은근슬쩍 바라시는 눈치를 보이셨고, 그와 1년 차이 나시는 어머님은 가족 해외여행 꿈꾸시며 생일을 반년이나 앞두고 며느리와 생파를 의논하려 전화를 하신다. 칠순이라서 그러신 거겠지..라고 생각이 들 때쯤 이제 66번째 맞이하는 친정엄마의 생신날이 되었다.

 '설마, 엄마는 생일을 기다리고 있진 않겠지? 엄마는 나랑 같은 성향이니까. '

나의 생각은 완벽하게 불일치함을 알게 되는 순간, 유전자 검사를 해볼까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생일 이틀 전인 주말에, 동생네가 친정으로 출동하면서 생일파티는 시작되었다. 함께 외식을 하고, 케이크 초를 불고, 선물을 드렸다. 손주들이 재롱을 부리고, 가족끼리 게임도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할 거 다 했으니 쿨하게 헤어지려 하는데 한마디가 훅 들어온다.

"내일 일요일인데 다들 오늘 가려고?"

일동 모두 일시정지가 되었다. 아이들은 더 놀 생각에 신이 났고, 며느리와 아들은 놀러 갈 곳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라 출근해야 하는 남편만 특별히 열외다. (3교대가 부럽긴 처음이다.) 혼자 사시는 생일 주인공이라 시끌벅적을 원하시나 싶어 다들 군말 없이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일요일 아침, 6시부터 일어나 딸기 농장을 다녀왔다. 또 외식을 했고 오는 길에 휴양림 앞 예쁜 카페에 들러 사진을 찍었다. 293장. 하루동안 찍은 사진의 수다. 300여 장의 사진에는 항상 엄마가 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딸은 또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줌을 하고 한 번 더, 배경이 나오게 하나 더!! 무한 셔터를 눌러댄 결과다. 돋보기를 쓰고 열심히 사진을 확대하며 프로필 사진을 고르는 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눈 내린대."

"할머니는 좋겠다. 생일에 눈 와서. 내 생일 때도 눈 왔으면 좋겠다."

아놔... 하늘에 있는 아빠의 작전인가? 내가 이번 주 휴가 인걸 알고 엄마 생일 챙기라고 신호를 주는 것만 같아 날씨예보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다. 분명 오늘도, 어제도 함께 했는데... 엄마가 좋아하는 눈이 생일에 온다 하니 가까운 곳에라도 눈 구경을 하러 나가야만 할 것 같다.

"다음에 너 쉬는 날, 엄마 무주 한 번만 데려가 줘라. 거기 설경이 끝내준대."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산은 진짜 가기 싫은데, 곤돌라를 예약하는 나 자신은 산 보다 더 싫다. K-장녀 콤플렉스, 지긋지긋하다.

"내일 설경 보러 무주 덕유산 가자. 오전 7시 반까지 엄마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준비해서 나와."

"너무 좋지~ 알겠어"

신나 하는 OK이모티콘이 엄마의 표정을 대변한다. 그래. 효녀코스프레 제대로 해보자. 생일은 일 년에 한 번뿐이니까 기분 내시라 하지 뭐.

그래서 또또!!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아침 루틴을 행하고, 루틴에 없던 아침 준비와,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아이들을 깨워 방수옷을 입히고, 코코아와 커피, 초콜릿과 에너지바 등 열량을 낼 간식과 핫팩, 장갑, 귀마개 등 집에 있는 보온템들을 다 꺼내 가방에 담아 차에 실었다.

1시간 남짓을 운전하는 동안 엄마는 조수석에 앉아서 내가 초등학생 때 대관령에 갔었던 이야기부터 아빠와 동생이 함께 여행한 레퍼토리를 다 꺼내며 추억놀이에 빠지셨다. 뒤에서는 아이들이 얼토당토 한 이야기를 하며 장난을 치고 떠들고 있고, 내비게이션은 는 메라가 있다고, 오른쪽으로 가라고 누구에게든 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그 순간 나는 다짐했다. 내 생일엔 절에 들어가 묵언수행을 하겠노라고. (참고로, 나는 천주교 신자다.)




덕유산 국립공원은 역시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1시간 동안 줄을 서서 예매한 표를 출력받아 정상으로 향하는 곤돌라를 탔다. 마치 누군가가 산에 하얀 펄가루를 뿌린 것처럼 온통 세상이 하얀 산속을 바라보며 힐링을 하.... 기는 개뿔. 이미 재미없고 시시한 아들들을 어르고 달래며 투덜거리는 입을 간식으로 막느라 바빴다. 설천봉에 내려서는 온통 새하얀 세상에 반해 사진 찍고 싶은 엄마와 산에 오르기 위해 대여한 스틱으로 칼싸움하는 아들들 사이에서 아이젠도 빌리고, 약도 먹고, 사진도 찍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누가 얘네들 좀 말려줘요ㅠㅠ

눈꽃산행이 시작해서는 엄마와 아들들로 두 팀이었던 것이 엄마와 1호, 2호 세 팀으로 갈라졌다. 등산화 신고 왔다며 돈 아깝게 아이젠 빌리지 말라고 한사코 말리던 엄마는 이리저리 미끄러지기 바빴고, 1호는 눈꽃이 바람에 날려 방해만 된다고 투덜거리며 정상을 향해 혼자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2호는 저~어기 뒤에서 어디까지 가야 하나며, 언제 집에 가냐고 반쯤 드러누운 자세를 유지하며 투덜거리고 있다.

내가 왜 여길 오자고 했을까. 파란 하늘과 새하얀 눈과 포근해 보이는 구름이 너무나 환상적인 겨울에 온몸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3인 3색의 순간




"잘 도착했어?"

남편의 메시지에 바로 영상통화키를 눌렀다.

"오빠"

"우와~ 거기 진짜 멋있다. 카메라 좀 제대로 비춰봐. 비행기에 타고 있는 것 같네."

"지금 풍경이 눈에 들어와? 내 상태는 안 보여?"

애꿎은 남편에게 불똥이 튀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한 명씩 비춰주자 남편은 그냥 웃기만 했다. 위로와 위안을 받으려던 통화는 화만 더 돋우며 끊겼다. 줄 서서 사진 찍느라 바빴던 엄마는 이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여느 아이들보다 더 해맑은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우리 집에 가는 길에 한옥카페 들렀다 갈까? 몸도 녹일 겸.. 여기 근처에 있대."

"아니. 싫어. 집에 갈 거야. 밥도 안 먹어도 돼.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엄마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 당황했지만, 내 표정을 보고는 알겠다 하시며 갑자기 속도를 내어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 얼굴을 보고 아셨을 거다. 그립고 즐거웠다는 그 추억의 가족여행 속 엄마가 지금 모습에서 보였을 테니까.


+) 제가 다녀온 곳이 궁금하시다면...

https://blog.naver.com/sunny-star/223321586783


이전 02화 딸기 농장에서 찾은 평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