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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Feb 22. 2024

엄마의 시간

<엄마의 소신 2> 이지영

길고 긴 방학의 끝이 보인다. 그 끝과 함께 나의 체력도 바닥이 나고 있다. 선생님이 죽을 만큼 힘들 때 하는 게 방학이고, 엄마가 쓰러지기 직전에 하는 게 개학이라더니 누가 한 말인지 정말 적절한 표현이다.

한 달 넘게 24시간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나름의 루틴이 생겨 편해졌지만, 그럼에도 힘든 건 힘든 거다.

오늘도 아이들의 점심을 만들어 TV앞에 차려주고는 익숙하게 영어영상을 틀어주었다. 아이들을 손을 씻고 쪼르르 앉아 먹으며 재미있게 시청을 하는 동안 나는 최대한 아이들과 멀찍이 앉아 혼자 덩그러니 남은 밥과 반찬을 그릇 하나에 담고 책을 꺼내어 보며 밥을 먹는다. 가끔은 핸드폰을 보기도 하는데, 소리라는 자체가 너무 힘들고 지치게 느껴질 때가 많아 무소음의 행위인 책을 주로 선택한다. 아이들과 지내면 정말이지 조용할 틈이 없기에 이렇게라도 잠시나마 혼자 조용히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나 같은 엄마들이 많은 걸까? <엄마의 소신 - 두 번째 이야기> 중 '누가 모르냐고요'에서 엄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대변한 글이 사이다만큼이나 속을 뻥 뚫어준다.


아이에게 화내는 이유는 엄마 감정이 처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체력이 달리기 때문이니 엄마만의 시간을 갖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요. 그 시간을 누가, 어떻게 확보해 주냔 말이죠.
- 중략-
방학이 힘들게 느껴졌던 건 나만의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에게 종종 부탁하세요. 지 금부터 딱 30분만 엄마 일을 할 테니 엄마를 부르지 말라고요. 물론 잘 안 지켜지지요. 그래도 하세요.
-중략-
방학이 끝없이 길게 느껴져도 이 시간은 끝나게 되어 있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있어요.


백번 고개를 끄덕여도 모자랄 이야기다. 엄마에게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알지만 그 필요한 시간을 누가 줄 수 있는지 엄마들은 그게 궁금한 거다. 저자인 이지영 작가님은 스스로 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남편을 육아에 적응할 수 있게 시간을 점차적으로 늘리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을 억지로라도 가지라고 했다.

'그래, 해 보자!'

책을 읽다 말고 접었다. 지금 바로 실행하지 않으면 또 흐지부지 넘어가고는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먹다 남은 밥을 대충 설거지통에 넣어놓고는 TV속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엄마, 30분만 나가서 커피 좀 마시고 올게"

"누구랑?"

"엄마 혼자. 그러니까 위험한 일 생긴 거 아니면 전화하지 말고 기다려."

아이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외투를 챙기며 단호하게 명령하듯 전달했다. 방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엄마 없이 30분 정도는 집에 있을 수 있을 나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넷플릭스가 그 들을 잘 살펴줄 거라 믿었다. 집 밖은 3일째 내리는 비로 춥고 흐리지만 갑작스러운 외출을 하는 나의 표정을 매우 맑음이었다.




 커피숍을 어디로 갈까 아파트 정문에 서서 잠시 고민을 하다 스타벅스를 가기로 했다. 스타벅스의 상표에 있는 여신이, 스타벅스 매장 인테리어에서 주는 나무색과 초록색의 조화로운 분위기가 나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포근히 안아줄 것 같았다. (사실 스타벅스를 가장 좋아한다.) 1분 1초를 아쉬워하던 게임할 때 아이들 심정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가는 내내 무엇을 마실지 고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페의 조용한 피아노 소리가 창밖의 비 내리는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려 창가에 앉기로 했다. 오늘따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했는지 그동안의 방학이 억울해서 되돌리고 싶기까지 했다. (막상 돌아가라면 안 돌아갈 테지만)

음료를 기다리며 전시되어 있는 상품들과 케이크들도 찬찬히 살펴본다. 케이크도 한 조각시킬까 고민했지만 30분이란 시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과감하게 패스 했다. 따뜻한 라테의 부드러운 거품을 음미하며 카페 인테리어를 둘러보고, 라테 한 모금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핸드폰은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았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이 소중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30분이란 시간은 예상대로 너무 빨리 흘렀다. 오고 가는 시간까지 포함을 했어야 했는데 급작스럽게 나오느라 책에서 언급한 단어 '30분'을 계산 없이 내뱉은 게 잘못이었다. 그래도 나만의 시간을 갖는 방법을 하나 알게 되었으니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직 반이나 남은 커피가 너무 아쉽다. 여기서 다 마시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테이크아웃 잔으로 바꾸어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마지막 순간까지 여유를 가져보자며 빗소리와 지나가는 차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걸어본다.

"아악!!"

커피 한 모금 CF처럼 고상하게 마시려 하자, 라테는 너는 맥심 모델이 아니라며 정신 차리라는 듯이 내 입이 아닌 윗옷으로 흘러갔다. 컵의 뚜껑이 제대로 안 닫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우아는 개뿔. 이참에 밀린 빨래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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