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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Mar 20. 2024

아빠의 여자친구

"엄마, 아빠가 여자친구 생겨도 괜찮지?"


집안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하더니, 반경을 좁혀 내 주위를 서성이는 1호다. 신경쓰이니 하고 싶은 말 빨리 하라며 짜증스럽게 재촉하는 엄마의 닦달에 결국 속마음을 꺼냈다. 갑자기 여자친구라니!!그것도 네가 아닌 아빠라고??뜬금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하여 대체 무슨 말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여자친구? 무슨 여자친구?"

"아니.. 그게 있잖아... 내가 그냥 생각한 거야."

"??"

"아니야. 아닐 거야. 내가 아빠 통화하는 거 보니까 확실히 남자였어. 그리고 카톡도 내가 아는 삼촌들이랑 하는 거니까 엄마는 신경 쓰지 마."

"너 아빠 핸드폰 봤어? 왜?"

"본 게 아니고 아빠가 통화하거나 카톡 할 때 옆에 있어서 본 것뿐이야. 진짜야."

"알겠어. 엄마가 혼내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묻는 거야. 왜 갑자기 아빠가 연락하는 사람이 궁금했어?"

"사실은..."

아이의 대답은 이러했다. 남편은 교대근무를 하는 직업이라 출퇴근 시간이 매우 일정하다. 새벽조일 때는 6시 출근/오후 2시 퇴근, 오후조 일 때는 2시 출근/ 10시 퇴근, 야간근무일 때는 10시 출근/6시 퇴근. 근무 일정 또한 반복적이라 초등학생인 아이들도 아빠가 오늘 무슨 근무인지, 언제 쉬는지 패턴을 파악해 물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정도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가족 4명이 완전체로 함께 있을 때를 가장 편안해하는 다른 구성원들과는 사뭇 다른 유전자를 가진 1호는 매일 아빠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는데 요즘따라 아빠가 일찍 출근하거나, 늦게 집에 오는 일이 잦아졌다. 어떤 날은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고 그다음 날 밤늦게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13년 그의 인생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의 불규칙한 출퇴근에 아이는 혼자 많은 생각과 상상을 한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은 못 하고 혼자서 불안해하며 걱정에 휩싸인 1호는, 남편의 부재로 독박육아를 하게 되어 예민해진 엄마를 관찰하며 부부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아빠가 여자친구 생긴 걸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어디서 이런 막장 시나리오를 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순수하고 감정적인 1호에겐 일생일대의 커다란 고민거리였을 테다. 그래서 고민하고 눈치 보다 혼자서 해결하려 아빠를 염탐했고 그리고나서는 이걸 엄마에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생각하던 중에 눈치빠른 엄마가 갑자기 질문을 매섭게 하니 할 수 없이 얘기를 한 것이다.

"(애써 웃음을 참으며) 여자 아닌 거 확실해?"

"응! 내가 확실하게 들었어. 남자목소리. 엄마도 박보검 삼촌 알지? 그 삼촌이랑 통화하더라고. 그리고 카톡은 차은우형이랑 김수현 팀장님이랑 했어."

"이름을 남자로 바꿔놓고 연락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무슨 대화하는지를 봐야지. 사랑한다 이런 말 있는지"

"아~ 그건 못 봤는데... 내가 아빠 오면 아빠 카톡 할 때 다시 볼게."

"아니야~ 엄마가 장난한 거야. 1호 귀여워서."

"아니야? 엄마는 아빠가 왜 자꾸 집에 안 오는지 알고 있어?"

"그럼~ 아빠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했거든. 그래서 바빠서 그래.

그리고 아빠가 안들어오는게 아니라 너희들 잘 때 들어왔다가 요즘 새벽근무라 일찍 출근하셔서 못본거야."

"아..그런거구나. 그런데 아빠 무슨 일하는데?"

"쿠0맨"

"쿠0맨? 슈퍼맨 뭐 그런 거야?"

"음.... 그런가? 이따 아빠 오면 자세히 물어봐."


남편의 여자친구


안도를 한 1호는 기분이 좋아져서 동생과 나가서 논다며 민망함과 쑥스러움을 감추기 바빴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우면서도 웃음이 나는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해 박장대소를 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웃는 거야, 우는 거야?"

"아~ 나 못살겠어. 아하하하하학"

"숨 넘어간다. 뭔데?"

"오빠, 크크큭 요즘 연애한다며? 크크크 크큭"

"나 연애해? 누구랑?"

"나야 모르지 크크 크큭. 아무튼 아들한테 걸렸으니까 얼른 자수해 크크큭"

 어이없어하는 남편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자꾸 웃음이 나온다. 나도 안 하는 의심을 하는 아들은 아빠바보를 넘어서 의부증이라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고, 혼자서 고민하는 1호의 모습에서 찡한 안쓰러움을 느껴야 하는데 계속 웃기기만 한 건 엄마로서 정상이 아닌 것 같지만 참으려 해도 입술 사이로 삐집고 나오는 웃음을 막을 재간이 없다.



그날 저녁,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1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의 새로운 일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너네 배달 음식 시켜 먹잖아. 그거 하는 거야. 배달"

"엄마가 쿠0맨 이랬는데?"

"그게 그거야. 그거 할때도 있고 배달의00 할때도 있고."

"나 그거 본적 있어. 아빠 그럼 유니폼도 있겠네? 광고 보니까 헬멧이랑 가방이랑 다 있던데?"

"어 있지. 바지위에 빨간 팬티 있고, 빨간 망토 쓰고 다녀."

"푸하하하하하하! 아빠 슈퍼맨이다."

"아빠, 진짜야? 그럼 보여줘봐. 빨간 팬티 진짜 있어?"

"안돼. 그건 배달할 때만 꺼낼 수 있어."

"그럼 옷은 쫄쫄이 입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아빠 배 나온 거 다 보여서 엄청 웃길 텐데 크크큭"

"아무튼, 아빠가 배달 많이 해서 돈 많이 벌면 맛있는 것 사줄 테니까 기다려봐.

 아빠 보고 싶거나 할 말 있으면 아무 때나 전화하고."

그렇게 농담반 진담반 섞은 대화로 남편의 여자 친구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의심의 싹을 잘라버리려는지 남편은 그 후로 모든 통화를 최대 음량으로 키워서 아이들 옆에 앉아 부자연스럽게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취미삼아 용돈벌이 알바였던 쿠0맨은 애들 잘 때만 나가기 시작했다. 1호는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다시 생겨서 매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나는 굳이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나싶다.


이러면 내가 의심이 되기 시작하는데...

진짜 알바가 아니였던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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