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니라 협업
결혼은 두 사람이 인생이라는 공동 프로젝트를 함께 운영해 가는 일이다.
감정이 출발점이라면, 협업은 관계의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결혼도 조별과제랑 비슷한가?’
조별과제에는 네 부류 정도가 존재한다.
- 연락두절형: 몸이 아프거나 가족사가 생겼다며 연락 안 되는 사람
- PPT치장형: 발표자료만 슬쩍 꾸미는 사람
- 말만하는형: 발표만 맡고 다른 건 나 몰라라 하는 사람
- 책임형: 끝까지 책임지고 조별과제를 완수하는 사람
처음엔 웃겼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결혼의 현실과 겹쳐 보였다.
결혼도 결국,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네 번째 타입, 책임형과 결혼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를 관찰하면서,
‘이 사람이 네 번째 유형이구나’ 하는 순간이 하나씩 쌓였다.
예를 들어, 내가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는 “괜찮아?”라고 묻는 대신, “일을 줄이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물었다.
감정을 달래는 대신, 문제의 빈자리를 찾아 메우려 했다.
약속한 일이 있으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여행 계획이 어긋나도 바로 대체 일정과 교통편을 찾아냈다.
가끔은 답답할 정도로 체계적이었지만, 일이 생기면 불평보다 해결책을 먼저 내놓았다.
이런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네 번째 유형’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섣불리 시작하지 못했다.
그의 재미없음이 마지막 1%의 확신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이트 중 "이 커피 맛있다"라고 말하면,
"이건 에티오피아 산이야"라고 답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농담을 던지면 진지하게 팩트체크를 했다.
감성적인 대화보다 실용적인 정보 교환이 편한 사람.
우리는 약 3개월간 애매한 상태를 유지했다.
같이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조심스럽게 가까워졌다.
관계를 확정 짓지 않은 채, 정해진 날짜에 만나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만날지 말지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연애를 하고 싶어요."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는 나를 만나는 동안 다른 소개팅 제안도 왔었지만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사람은 배려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결혼 기준을 찾으면서 본 말이 떠올랐다.
'결혼은 중요한 세 가지만 맞으면 된다'라고.
그래서 나도 내 기준을 세워둔 게 있었다.
1) 가치관이 통할 것 : 세상을 보는 눈이 비슷해야 갈등이 줄어든다.
어떤 문제를 볼 때, “그건 좀 아니지 않아?”라는 말이 동시에 나왔다.
2) 문제를 감정보다 대화로 풀 것 : 싸움이 아니라 조율이, 관계를 지탱한다.
감정이 거세지기 전에 덤덤하게 의견을 물어보는 사람이었다.
3) 책임을 중시할 것 : 말보다 행동이 신뢰를 만든다.
‘오늘까지 내가 처리할게’라고 말하면, 진짜 그날 안에 끝냈다.
그는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이었고,
나의 결론은 아래와 같이 정리됐다.
가치관이 A학점이면, 재미는 pass면 된다.
솔직히 고민은 됐다. 친구들처럼 설레는 연애는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 있다는 것. 나라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감정보다 구조가 먼저였고, 설렘보다 조율이 중요하다는 기준으로 선택한 만남이었다.
이제 이 실험은 어디로 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