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대신 납득으로 시작한 결혼
어떤 커플은 5년을 연애하고도 결혼을 망설인다.우리는 1년 만에 결혼했다. 삶의 방향이 맞고, 함께 살아갈 방식이 예측 가능했으니까.
우리는 퇴근 후 일정이 맞으면 한강변을 걷곤 했다.
걷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회사 일, 돈, 가족, 앞으로 어떻게 살고싶은지 같은 것들.
감정적인 이야기는 별로 없었지만, 대신 현실적인 대화가 쌓였다.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계속 이야기가 이어지다 보면, 결혼으로 가려나?’
결혼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미 우리는 감정보다는 구조를 실험하듯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법, 갈등 처리, 역할 분담이 자연스러운 주제였다.
감정의 온도는 높지 않았지만,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래서 결혼이 감정의 다음 단계라기보다,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를 현실로 옮기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는 그가 처한 현실의 상황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함께 살아갈 그림을 명확히 보기 위해, 실제 조건을 하나씩 확인해보고 싶었다.
며칠을 고민했다.
'저축액을 물어봐도 되나?'
'너무 계산적으로 보이는 거 아닌가?'
하지만 결국 물어보기로 했다.
애매하게 넘기는 것보다,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내가 먼저 이야기했다.
"나는 결혼하려고 이만큼 저축했는데, 당신은 어때?”
그도 은행 앱을 열더니 자기가 통장의 숫자를 슬며시 보여주었다.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누가 더 많냐, 적냐 서운해질 이유도 없었다. 이제부터 같이 만들면 되니까.
“그래, 결혼하자.”
둘 다 잠깐 웃었다.
확인도 끝났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상한 장면같지만, 우리의 방식이었다.
누군가는 “너무 성급한 결혼을 하는 건 아니야?” 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이미 투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은 선택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예비 시댁에 가는 날, 내가 늦잠을 자버렸다.
눈을 떠보니 기차는 이미 떠난 시간이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걸 뭐라고 말하지? 초반인데 인상 망치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전화를 했는데, 그가 하는 말.
“괜찮아. 회사 핑계로 못간다고 집에 이야기 해뒀어.”
나는 미안하고 당황했지만, 그는 평소처럼 덤덤했다.
“왜 그랬냐”고 할 법도 한데, 어쩔 수 없지 않냐며 그냥 넘어갔다.
그는 화내기보다 문제를 구조적으로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타입이야말로 함께 가정을 운영할 파트너로 제격이었다.
그가 결혼 준비 전 과정을 정리한 문서를 공유했다.
파일을 열어보니 이런 항목들이 있었다.
- 결혼식 예산 및 분담 방식
- 신혼집 위치 후보
- 양가 부모님 상견례 날짜 후보
- 혼수 준비 체크리스트
나는 웃으며 물었다. "이게 프러포즈야?"
그는 진지하게 답했다. "응. 말보다 계획이 확실하잖아."
달콤한 말보다, 함께 만들어갈 구체적인 그림이 믿음직스러웠다.
동시에 조금의 아쉬움도 있었다.
설렘은 없고, 회사 일처리 하듯 시작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명확하니 좋기도 했다.
사람들은 사랑을 끌림이라 말하지만, 우리에게 사랑은 ‘운영’에 가까웠다.
그때부터 결혼은 나에게 연애의 완성이 아니라 합병(M&A)처럼 보였다.
감정보다 시너지가 중요했고, 두 조직이 자연스럽게 합쳐질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를 점검했다.
1) 방향성 : 극적인 성공보다 꾸준한 성장.
“연 10점짜리 한 방보다, 매년 3점씩 올리자”에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2) 역할 분담 : 나는 감각과 관계, 그는 정보와 실행.
문제가 생기면, 나는 이해관계자 정리, 그는 데이터 수집과 실행으로 바로 나눴다.
3) 의사결정 구조 : 감정 대신 논리로 결정.
의견이 충돌하면, 텍스트로 안건을 정리했다.
그는 법이나 정리된 말에는 강하지만, 즉흥적인 대응은 약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텍스트로 남겨 두고, 각자 읽고 생각한 뒤 협의하는 방식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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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만난지 1년 만에 결혼했다.
연애를 길게 해도, 실전은 결혼 이후에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