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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의 조건을 테스트하기로 했다

비혼과 결혼 사이, 나를 실험대 위에 올리다

by LINEA


결혼은 감정의 결합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구조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를 사랑하느냐’보다 ‘누구와 시스템이 작동하느냐’를 보기로 했다.


나 자체로 판단받고 싶은 마음


어느날 아빠가 말했다.

“너는 결혼할 거면 하고, 말려면 말아라. 애매한게 제일 안좋아.”

아니,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확신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빠의 말은 나를 돌아보는 자극제가 됐다.

그 무렵, 이과 출신 친구와 커피를 마시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출산에 영향을 준대. 이건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더라.”
나는 대답했다. “그럼, 우리가 마냥 한가로운 나이는 아니겠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생각이 맴돌았다.
누군가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면 된다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보다 나이가 먼저 보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 늦어지기 전 결혼을 시도해야하지 않을까?’로 흘러갔다.


며칠 간 고민했다. 일기장에 끄적였다.


- 결혼, 언제? (근데 이게 내 마음대로 되나?)
- 기한을 정하자. 1년이면 해볼 만큼 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 1년 안에 결혼 상대를 찾는 실험을 해본다. 후회는 없을 것이다.
- 정 안 되면 성대한 비혼식이라도 하지 뭐…^^


그렇게, 나는 실험을 시작했다.

사랑이 오래가려면, 어떤 구조가 필요할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기존의 방식을 버리기


이전까지 나는 몇 번의 연애를 했다.

스무 살의 연애.
얼마나 자주 만날지, 언제 연락할지. 모든 게 감정의 흐름에 맡겨져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현실은 엇박자였다.

스물다섯의 연애.
‘이번엔 다를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감정이 먼저였다.
좋아했고, 만남도 유쾌했지만, 정작 현실을 함께 감당하지는 못했다.

서른 즈음 맞은 또다른 이별.
'좋아하는데 왜 계속 헤어질까.’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의 고찰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엔 다르게 접근하기로 했다.
일기장에 적었다. 좋아하는 사람 ≠ 잘 맞는 사람

그럼 잘 맞는다는 건 뭘까?
-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 피곤할 때도 최소한의 약속을 지키는지
- 책임을 피하지 않고 감당하는지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이건 이상형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운영 가능한 사람을 찾기 위한 실험의 초안이었다.

그렇게 기준을 정리해보며, 친구에게 부탁했다.
"혹시 소개시켜줄 사람 있어?"

친구가 한 사람을 소개해줬다.

내 기준이 현실에서도 작동하는지를 검증할 기회였다.


헷갈리게 하지 않는 사람


첫 번째 만남. 그를 처음 만난 시점에, 회사 일로 꽤 지쳐있었다.
특별히 더 꾸미거나 좋은 인상을 남길 여유도 없었다.
첫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말 대잔치에 가까웠지만, 그는 나의 말을 묵묵히 들어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첫인상? 딱 느낌이 꽂히지 않았다. 너무 조용했고, 감정 표현도 적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자연스러웠다.
‘막 설레지는 않는데, 마음이 편하네.’
그건 처음 느껴보는 안정감이었다.

두 번째 만남. 내가 개인 사정으로 약속 시간에 한 시간이나 늦었다.
'화났겠지? 어떡하지?' 걱정하며 달려갔는데,
그는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미안해요, 너무 늦어서."
"괜찮아요."
예의상 한 말이 아니라 진짜 괜찮아 보였다.
그때 생각했다. '이 사람은 무던한 타입인가 보다.'

그렇게 우리는 몇 차례 더 만났다.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편하긴 한데 연애 상대로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 있었다.
조용했고, 감정 표현이 적었고, 특별한 재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놓치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반응했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묵묵히 들어줬다.
연애 감정보다, '함께 있어도 괜찮다'는 느낌이 컸다.

일기장에 실험의 과정을 계속 써내려갔다.
"이 사람, 안정감이 있다. 설레진 않지만 편하다. 재미는 없지만 믿을 수 있다."

그때부터 점점, 이전과는 다른 기준으로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
감정이 아니라, 구조. 설렘이 아니라, 합.

사랑이 아니라, 운영 가능한 관계.


생각의 전환이 쉽지는 않았다.
마음의 온도를 낮추는 일 같기도 했고, 사랑이 아닌 계산으로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끝까지 갈 수 있는 관계’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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