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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로맨스 대신 등기부등본

사랑의 또 다른 언어

by LINEA


예측 가능한 합병이라도, 불안은 늘 존재한다.
우리는 낭만 대신, 서로의 증명으로 사랑을 지켜갔다.


도어록 – 불안 관리의 방식


남편은 외출 전에 도어록과 가스밸브를 촬영한다.
“그냥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니야?”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굳이 저렇게까지?


그는 담담히 말했다.
“나중에 불안해질 때, 다시 안 봐도 되잖아.”


대학 시절, 혼자 살던 원룸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날 이후 그는 불안을 기록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집엔 말보다 영상이, 걱정보다 증거가 남는다.
“잠겼겠지 뭐”라는 말 대신
“오늘 아침 8시 23분, 도어록 잠금 완료.”

이 문장이 우리 사이의 신뢰였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의 방식은 귀찮은 일의 반복이 아니라, 불안을 미리 없애주는 배려였다.
사랑은 때로, 걱정시키지 않는 일의 다른 이름이었다.


전세사기 – 책임의 완수

결혼 후 처음 맞은 전세 만기였다.

남편은 집주인에게 통보했다.
“O월 OO일에 나갈 예정이니 전세금 돌려주세요.”
“알았어요.”
하지만 돈은 오지 않았다.

처음엔 실수겠지 싶었다.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결국 돌아온 말은 하나였다.
“세입자 안 들어와서 못 줘요. 민사소송 넣던가요.”


계약자는 남편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어떻게 돼가?”
“진행 중인데, 시간이 걸려.”
남편의 말은 늘 같았다.


왜 나만 초조한 걸까, 왜 그는 이렇게 조용한가.
처음엔 생각했다. '왜 계약할 때 제대로 확인 안 했지?'
하지만 갈궈봤자 뭐가 달라질까.


그런데 나중에 알았다.
그는 불안한 말을 반복하기보다, 확실한 결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은 집주인에게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등기부등본을 다시 떼서 확인하고, 집주인이 가진 다른 부동산 정보까지 모두 알아냈다.
시간 나면 문자로 증거를 남기고, 법률 자문을 받았다.

"이런 것도 다 조사하네?" 싶었지만, 그게 남편의 방식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정보로 싸우는 것.


자금을 돌려받기까지 3년이 걸렸다.
남편의 계좌에 나머지 돈이 입금됐을 때, 그는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됐네요.” 그게 전부였다.


나는 알았다.
말은 없어도, 끝까지 자기 몫을 해내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를 더 신뢰하게 됐다.


등기부등본 – 신뢰의 위임


우리가 처음 산 집은 남편 단독 명의로 했다.
사람들은 놀랐다.
“공동명의가 아니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일을 맡겼으니, 권한도 같이 줘야죠.”

사실 과거에 한 번, 남편의 판단을 못 믿고 반대한 적이 있었다.
"여기는 도저히 실거주 못할 거 같아."
그때는 내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남편이 맞았다.

남편이 집 알아보는 일에 적극적이고, 지식도 더 많았다.
이후로 큰 방향은 남편이 잡게 하고, 나는 부차적인 의견만 주기로 했다.

남편의 이름이 등기부에 적히는 일은 남편의 로망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건 단순한 부동산 계약을 넘어, 그를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감성으로, 어떤 이들은 실용으로.

우리는 후자였다.
자본주의적이라고? 그럴 수 있다.
자산을 맡긴다는 건, 말보다 확실한 신뢰의 증거였다.

등기부등본은 건조한 서류였지만, 우리 관계의 구조를 증명하는 문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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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로맨스는 없었지만, 대신 확실한 것들이 있었다.
도어록 영상, 3년의 기다림, 그리고 등기부등본.

사랑이 사라진 게 아니라, 다른 언어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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