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 (주)가정의 규칙이 만들어지다

싸움 대신 회의, 감정 대신 규칙

by LINEA
싸움은 줄었고, 회의가 늘었다.우리는 어느새 부부라기보다 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주식회사 가정, (주)가정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규칙의 도입: 신혼여행 노트북 사건


혼여행 중, 급하게 남편이 원격근무를 해야 했다.

그런데 노트북이 없어, 내 카드로 대신 결제했다.
‘업무용이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일종의 신뢰 계약이었다.

그런데 귀국 후, 남편은 그 노트북으로 게임이나 유튜브 등을 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업무용으로 샀는데…?' 용도의 경계가 흐려졌다.

감정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명확히 정리하기로 했다."남편, 원래 사줬던 목적과 달라. 제 3자에게 판단 받아 소유권을 정리해보는 건 어때?"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누구한테?”

갈등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원고(나): 업무용으로 산 것이므로 목적이 달라지면 반환되어야 함.
피고(남편): 이미 귀국 후 업무가 종료됐으므로, 사용 목적이 사라졌을 뿐 위법 아님.


판사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숟가락을 세 번 탁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판결합니다. 노트북은 원고(아내) 소유로 귀속. 합의금 없음.”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평소보다 말수가 줄었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길래 슬쩍 화면을 봤다.

'부부싸움 이기는 법'


이건 단순히 노트북 논쟁이 아니었다.

기준을 잡아보는 실험 중 하나였다.


가정의 재산은 소유가 아니라 역할로 구분한다.

구입의 주체 보다, '구입의 목적'이 중요하다.

(주)가정의 첫 운영 원칙이었다.


위임의 정착: 나이롱뽕 대리참석


명절마다 하는 우리집만의 전통문화가 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엄마가 이야기 한다.

“너 나이롱뽕 해야지.” (나이롱뽕은 화투로 하는 숫자맞추기 게임이다)

나는 아이 옷과 수건 더미를 앞에 두고 남편에게 말했다.
“이번엔 남편이 대신 하고 오면 어떨까?”

남편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 전, 그가 나무위키를 켜 ‘나이롱뽕’을 검색했다.

남편은 처음엔 어른들의 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두 번째 판부터는 직접 참여했다. 이기든 지든 감정 기복 없이,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나이롱뽕 어땠어?”
“그냥 하는 거지 뭐.“
그러고는 덧붙였다.
“어른들이랑 잘 놀아드리는 게 여러모로 낫지 않나.”


그날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상황에 맞게, 넘겨야 할 일과 받아줘야 할 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라는 걸.

남편은 “왜 내가 해야 해?” 대신
“어디로 가면 돼?”라고 묻는 사람이었다.
이런 모습이, (주)가정의 신뢰를 단단하게 했다.


이후에도 그는 매 명절마다 꾸준히 대리 참석 중이다.
장모님은 “사위가 점점 잘 친다”며 흐뭇해했고,
나는 덕분에 집안일을 조금 더 여유롭게 끝낼 수 있었다.


(주)가정의 자율: 생활 가전 수리


가전이 고장났다.

“이거 고칠 수 있을까?”

공대 출신인 남편은 잠시 보더니 말했다.

“부품만 있으면 될 것 같아.”


나는 당근마켓에서 같은 모델을 찾아 연락했다.

“지금 거래 가능할까요?”

약속을 잡고, 남편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부품 가지러 가자. 오늘 처리해 버리게.”

남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는 판매자와 장소를 조율하고, 남편은 차를 몰았다.


남편은 설명서를 한쪽에 펼쳐 두고, 부품을 하나씩 살폈다.

“이건 십자 드라이버로 빼야겠다.”

혼잣말로 말하며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여기 먼지 많네. 청소기 좀."

남편은 내부를 청소하고, 부품을 교체하고, 다시 조립했다.

나는 옆에서 분해한 부품들을 순서대로 정리했다.


20분쯤 지나자 남편이 말했다.

"다 됐어. 테스트해볼게."

전원을 켰다. 작동한다.


상황을 지켜본 엄마가 말했다.

"너희는 진짜 알아서 척척이네. 합이 좋다."


맞다. 이쯤 되면 우리는 말이 필요 없었다.

누가 뭘 해야 하는지 정한 적 없지만, 각자 해야 할 일을 안다.

고장 나면 남편은 손이 먼저 가고, 필요한 건 내가 이미 찾아둔다.

서로 잘 하는 일을 선택한다.

그게 우리가 만든 자율의 형태였다.


(그래도 가끔은 회의를 해야 한다. 완벽한 자율은 없으니까.)

keyword
이전 06화5. 로맨스 대신 등기부등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