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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주)가정의 주주총회

1년의 가정 운영 보고서

by LINEA
(주)가정은 올해도 무사히 돌아갔다.
이제 남은 건, 조별과제의 마감 보고서다..
거창한 회의가 아니라, 거실에서 “이번 해는 어땠어?”라고 묻는 시간이다.


(주)가정: 주주총회


주주총회라고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냥 거실에 앉아서 "이번엔 어땠어?"라고 묻는 시간이다.


(주)가정의 공식 지분 구조는 다음과 같다.
- 남편 40%

- 아내 40%
- 남편 쪽 부모님 10%
- 아내 쪽 부모님 10%

숫자만 보면 우리 둘이 대등하지만, 실제 의결권은 다르다.
양가 부모님은 10%밖에 안 되지만,
"그건 좀..." 한마디에 안건이 전면 재검토된다.
사실상 거부권 보유 주주다.

오늘 주총에는 양가 주주들이 불참했다.
부의안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활 운영 안건이라, 주주 개입 사안이 아니었다.

대신 핵심 이사 둘만 참석했다.
나는 운영 담당, 남편은 재무 담당이다.


회의는 오후 9시 30분 거실에서 시작됐다.
남편이 노트북을 열고 회의록을 작성한다.


"올해는 큰 일은 없네.”
“응, 3개만 짚고 끝내자.”

(주)가정의 작은 일부터 미래 방향까지 간단히 이야기한다.


[안건 1] 생활 시스템 점검
"관리비 절감을 위해 이체 방식을 네이버페이로 변경."
“이의 없음.”

[안건 2] 커뮤니케이션 프로토콜
“논의는 가능하면 피곤하지 않을 때, 그리고 노션(생산성 툴)으로 기록을 남기자."
“응, 기록이 있어야 명확하지."

[안건 3] 내년도 방향
자녀 양육을 대비해 안정의 운영 체계로 전환.
“그럼 투자형태는?”
"내년은 모험 말고 생존. 미국 지수 ETF로 간다."
“합의 완료.”


“수고했고, 하반기에도 잘 지내보자.”
한마디로 이번 주총을 마무리했다.


재무 상태 점검


"올해 지출 정리해 볼까?"
남편이 엑셀을 켠다. 카드 내역을 정리해 본다.
우리는 각자 카드를 쓰지만, 1년에 한 번쯤은 전체 흐름을 확인한다.

"13만 원? 이거 뭐였지?"
"아, 그거 네가 사준 신발."
"... 맞네."
"이건?"
"남편이 사준 거잖아.”

서로 사준 게 섞여 있으니, 따지는 게 무의미했다.

돈 쓴 걸 하나하나 계산하려는 건 아니다.
올해 이 정도 썼구나 확인하는 정도다.

예상보다 더 썼으면 "내년엔 좀 줄이자",

적게 썼으면 "올해는 잘했네" 하고 넘어간다.


남편이 말한다. "올해 저축률 괜찮았어.”
"얼마나?"
"작년보다 5% 상승."
나는 웃는다.
"그게 중요해?"
남편은 진지하게 답한다. "응. 중요해."


한 번 더 묻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저 사람의 언어에서 중요함 = 안정이라고 스스로 번역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크 관리: 이혼 계산


돈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약’을 생각하게 된다.
보고서에는 손익뿐 아니라 리스크 항목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어느 날, 우리는 정말로 ‘이혼’을 시뮬레이션해 봤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면, 집은 어떻게 나눠?"
"재산분할 검색해 볼까?"
남편이 인터넷을 뒤진다. 판례, 계산법, 예시 금액까지.
우리는 숫자를 넣어본다.

"생각보다 많이 나가는데?"
"그러니까 이혼 안 하는 게 낫겠네."


웃으면서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이혼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고 나니,
오히려 관계를 더 잘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대화가 오히려 안심이 됐다.
최악을 함께 계산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서로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그게 우리식 안전장치였다.


수시 회의: 주말 일정 조정


주총은 1년에 한 번이지만, 수시 회의는 필요할 때마다 연다.

크고 작은 운영 이슈는 대부분 여기서 에서 해결된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이 회의에 더 진지했다.


어느 주말, 우리는 또 부딪혔다.
나는 "토요일에 장 보자"였고, 남편은 "토요일에 좀 쉬자"였다.

"회의 열까?"
"응."


남편이 노트북을 꺼낸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는다.

"이번 안건은 주말 일정이야."
"나는 쉬고 싶어. 요즘 피곤해."
"나도 피곤한데, 냉장고가 비어있어."


우리는 5분쯤 이야기한다. 그리고 합의점을 찾는다.
해산물처럼 직접 봐야 하는 건 토요일 오전, 나머지는 온라인으로.

━━━━━━━━━━━━━━━━ (주)가정 수시 회의록 ━━━━━━━━━━━━━━━━
일시: 20XX 년 X월 X일
참석: 남편, 아내

안건: 주말 일정 배분

[의결 사항]
- 1주 차 토요일: 공동 장보기
- 2주 차 토요일: 개별 자율
- 변동 시 전주 금요일까지 재협의
[비고]
- 온라인 구입 가능한 물품은 미리 주문할 것
- 회의 소요 시간: 5분
- 만장일치 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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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록은 공유 문서로 저장해 둔다.


그리고 2주 차 주말, 나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고 남편은 푹 쉬었다.
서로 크게 간섭하지 않으니, 싸움이 줄었다.


우리는 감정보다 합의로 움직였고,
그게 (주)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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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감정 대신 숫자를, 다툼 대신 결산을 택했다.


결혼은 손익계산서가 아니라 현금흐름표에 가깝다.

감정이 흑자일 때도 있고, 체력이 적자일 때도 있다.
그 사이를 맞춰가며 정기적으로 결산한다.


잘 돌아가는 날은, 마주 앉아 남편이 정성껏 내린 커피를 즐긴다.


흑자는 숫자가 아니라, 이런 평온함이었다.
운영의 성과이자, 함께 버텨낸 시간의 이익이었다.


가끔은, 특별히 남편이 구운 빵을 함께 먹는 날도 있었다.

내겐 이 빵이 왠지 배당금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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