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였던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혼자 집에서 쉬고 있었다.문득 예전에 미리 구매해놓았던스릴러 영화 <세븐>이 생각났다.
나는 간이 많이 작아서 공포물이나 스릴러는 평소에 혼자서 못 보는 편이다. 그래도 <세븐>은 워낙 유명한 영화라서 혹시나나중에 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해서사뒀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건 실수였다.
때마침 하늘에 구름이 많이 낀 우중충한 오후여서, 나름 스릴러와도 잘 어울려 보였다.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용감하게 혼자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의문의 살인사건 증거자료들을 어둠 속에서 하나씩 비추며 지나가는 영화 오프닝은 무척 음산하고 괴이했다. 별생각 없이 TV 주변을 스윽 훑어보던 나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진짜 공포를 경험했다.
TV 앞에는 내가 장식용으로 놔둔 초소형 유리공예작품인 세 마리의 동물들이 있다. 크기가손톱만 해서무척 앙증맞고 귀엽다.
그중 한 마리가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곳에는 단 두 마리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갑자기심장이 빨라지면서 두뇌의 혈압이 급격히 높아졌다. 그 찰나의 짧은 순간에수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 집에는 나 혼자만 살고 있고, 최근 2주일간 나 이외에 그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으며, 세마리의 유리인형들이 전부 잘 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건, 이틀 전에 집안 청소를 했을 때였다. 그렇다면...
어제 내가 집을 비운 새에 누군가가 이 집에 들어왔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지금 베란다나 보일러실에 누군가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 끔찍한 타이밍에 기분 나쁜 장면과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영화는 나를 더욱 심란하게 했다. 벌떡 일어나서 TV를 꺼버렸다. 순간집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오로지 빠르게 뛰는 내 심장소리만이 들려왔다.
온 방안을 샅샅이 살폈다.유리인형 하나가 사라진 것 이외에 누군가가 손을 댄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베란다나 옷장 속에도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공포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내 집은 4층이다. 하나뿐인 창문을 통해 들어온 흔적은 전혀 없었다. 누군가가 들어왔다면 분명히 유일한 통로인 현관문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즉시 드라이버를 꺼내서 현관문 도어록을 열고 비밀번호를 바꿨다. 혹시 현관문 바깥에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설치된 소형 폐쇄회로 카메라가 붙어있지는 않은지도 빈틈없이 확인했다.
내 방에 돌아와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가쁜 숨 사이로 서서히 불안이 잠식해 들어왔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내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할 것만 같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왜 하필이면 그 인간은 이 집에 들어와서 다른 건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손톱만한 유리인형 하나만 가져간 걸까? 왜? 의문과 불안은 의심을 먹으며 더욱 커져만 갔다.
왜 더 크고 눈에 잘 띄는 장식용 지구본이라든가, 귀한 한정판 맥주잔이나, 비싸게 산 기타랑 노트북은 건드리지 않은 거지? 그리고 왜 하필 연휴 도중에 들어온 거지? 왜?
왜?
그다음으로 뇌리에 떠올랐던 생각은, 내가 남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 바로 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강도의 손에 쥐어진 섬뜩한 칼과 차가운 권총으로 여러 번 목숨을 위협받았었던,브라질에서의 그 끔찍한 경험들! 결국 나로 하여금 안정적인 생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든 그 기분을 다시금 느꼈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귀가하는 순간까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범죄자와 마주칠지 알 수 없었던 도시에서 15년을 보냈던 경험은 나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브라질에서나는 그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사람들이 많은 한낮의 대로보다 차라리 조금 어둡더라도 아무도 없는 골목길이 더 안전하다고느껴진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귀신도 괴물도 아닌 사람이었다.
한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바로 그때의 기억들이 망령 같이 되살아나와 내 뒤통수를 망치처럼 후려친 것이다. 내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이제 나랑은 더 이상 상관없을 거라고 치부해버렸던 범죄의 직접적인 대상 또는 표적이 된다는 두려움. 브라질을 떠나온 이후로 오랫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바로 그 공포.
그 순간, 이 거대한 도시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약자들이 떠올랐다. 혼자 사는 여성이, 노인이, 어린이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그들이 겪는 현실에 내가 직접 대면한 순간에 너무나 뼈저리게 그들의 심정이 공감되었다.
이제 나는 예전처럼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마음 편히 집을 비우고 외출할 수 있을까? 내 삶의 안전은 누가 보장해줄까? 나의 불안을 토로할 곳은 어디인가? 이제 무엇을 믿고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앞으로 이곳 서울에서도 평생 마음 한 구석에 불안을 키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돼버린 걸지도 모른다. 브라질에서 그러했듯이.
누군가가 날 해칠지도 모른다는,
끝도 없이 막연한 의심을 품고서,
모두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등 뒤를 살피면서,
망각이 나에게 선의를 베풀 때까지.
그날 밤, 나는 사라진 그 문제의 유리인형이 TV 찬장 뒤쪽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걸뒤늦게 발견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이 다 풀려버린 나는, 다시 영화 <세븐>을켰다. 그러다영화가 약간 루즈해지는 틈을 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