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근처에서 살았다. 화려한 사인보드와 시원하게 뚫린 거리, 그곳은 늘 밝고 분주했다. 밤이 와도 불빛이 꺼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바람처럼 흘러갔다. 그 사이를 빠르게 걸었다. 할 수 있는 한 속도를 높이며, 마치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기분으로 내 작은 방을 향했다. 바둑판같은 길을 직진하고, 좌회전하고, 우회전한 뒤 다시 직진하면 도착했다. 정해진 각도로만 접히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사 오고 나선 다르다. 동덕여대에 가까운 새로운 동네의 길은 부드럽게 굽이친다. 짧은 오르막을 지나면 완만한 내리막이 이어진다. 걷는 동안 다리에 들어가는 힘이 다르고, 숨이 바뀐다. 발걸음의 박자도, 시선이 머무는 속도도 예전과 다르다. 장소의 결이 달라지자 몸의 리듬도 함께 달라진다.
엄청난 광고판 대신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본다. 길모퉁이마다 삶의 흔적이 발끝에 닿는다. 밤에는 빛 대신 진짜 어둠이 있다. 예전에는 눈이 아팠는데, 이제는 어두워서 발을 조심한다. 이상하게도 그 어둠 속에서 오히려 조금 더 멀리 본다.
한때는 도시가 나를 밀어내는 듯했다. 눈부신 불빛 속에서 그림자는 희미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허공에 닿지 않는 계단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길이 나를 천천히 품는다. 걷는 동안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발끝이 땅에 닿는 감각이 선명해진다.
이곳에서 나는 다시, 걷는 법을 배우고 있다. 천천히, 길의 호흡에 맞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