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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건축

빛나는 6월, 죽음을 숙고하다

사라지는 것과 남겨지는 것에 대한 소고

by 이민정

한참 전에 써서 발표했던 글을 다시 읽는 건 이상한 느낌이다. 분명 일기를 썼던 건 아니지만, 글을 쓸 당시 일어난 일들이나 주로 하던 생각들이 같이 떠오른다. 글이 팰럼시스트가 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는 시간. 상처가 아물거나 감정이 변해가는 경로를 보는 건 이렇게 글을 돌아볼 때 가능한 듯하다.

몇 년 전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건축평단>>으로부터 이 화재사건에 대한 원고를 청탁받았다. 편집주간께서 이 사건으로 영감을 받은 글이면 뭐든 괜찮다고 여유를 주셔서 그 당시 자주 생각하던 죽음을 둘러싼 공간, 죽음을 '처리'하는 관습 등에 대해 쓰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3년째였고 사람들은 이제 정신 차리라 했지만 난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을 때였다.

아직도 죽음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모든 처리를 끝냈던가? 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월이 흐르긴 한다는 것은 하나 알겠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판타 레이. 만물은 흐른다. 그것 말고는 잘 모르겠다.



누구나 죽음을 이고 산다. 지금이라는 시간의 끝자락을 어제의 뒤안길로 접어 넣으며 매일을 살아가는 이 땅 위 모든 이들에게 죽음은 귓가에 서려있는 그 언젠가의 내일이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죽음이란 잊어야 할 나쁜 그대이다. ‘이 바쁜 세상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몰려오는 기억을 하나둘 애도로 지르밟으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추모의 사적 속도는 구조적으로 강제된다. 소중한 이의 죽음 앞에서 적절하다고 책정된 물리적 시간은 3일. 모든 정리는 이 안에 마쳐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기억과의 냉정한 전투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누구나 다 힘든 기억을 품고 산다며, 유난 떨지 말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적당한 때에 부정해야 할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정서적 성숙도와 감정 처리의 노련함이 필요하다.


지극히 사적이며 내적으로 강밀한 이 싸움에서 패배하거나, 해결해야 할 많은 것을 주어진 시간 내에 처리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심리적, 정서적 미성숙자 혹은 무능력자로 취급받는다. 기어이 “징글징글하다”거나 “징하다”는 말을 듣고 만다. 이 말이 꿰여있는 사건에 해당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부모상을 겪거나 상처, 상부하고도 오래도록 힘들어하면 지인들은 말한다. 이제 그만 보내주라고.


그런데 대체 어디로 보내란 말인가.


틈은 없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재 앞에서 전 세계 인구가 탄식했다. 갑자기 무너져버린,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익숙한 형상을 빼앗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황망한 화재 앞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무릎을 꿇은 채 울먹이고 눈물을 흘린 이도 있었다. 이 땅 위에 ‘있음’으로 시공간에 한 번 메였다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영원할 순 없다. 노트르담 대성당도 예외가 아니다.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라 냉철하게 바라보면, 그 형체를 잃어버린 게 지금이라는 것, 거기에 사라져버린 방식이, 그리고 사라졌다는 사실이 갑작스러운 것일 뿐, 그 무엇도 사실 그렇게 놀랍지는 않다. 그러나 수많은 이가 자신의 온기로 서로를 위로케 하고, 망연자실함으로 무릎 꿇게 하며, 울먹이고 눈물짓게 한 것,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 화재 현장 (c) BBC News


(c) Stephane Gautier / Alamy Stock Photo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 화재 앞에 애도하는 사람들 (c) Benoit Tessier/Reuters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 화재 앞에 애도하는 사람들 (c) Thomas Samson/AFP/Getty Image

죽음으로 소중한 이를 잃은 후에 힘든 것은 단지 외로움과 공허함 때문이 아니다. 존재 깊숙이 파고들어오며 정신을 점거하는, 떠난 이의 온기 남은 기억의 강이 여전한 관성으로 말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땅에 붙은 기억의 중력은 순식간에 휘발하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여겨오던 매일에서 잃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 일상의 기반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흔들림 속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다 보면 천천히 그 강도가 줄어든다. 서서히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 그때가 올 때까진 홀로, 또 함께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주어야 한다.


후쿠시마 지진은 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 건에 달했던 사건이라고 한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말처럼 모든 이의 죽음은 개별적이다. 각자의 몸이 누린 시공간을 하나로 퉁 쳐 묶을 수는 없다. 노트르담의 화재 또한 단지 건물 하나가 불타버린 사건이라 할 수 없다. 무너진 것은 전 세계의 인구, 세대를 거쳐 이어져 흐르는 수백억, 수천억 사람들의 기억과 삶, 아마 그것일 것이다.


사라져버린 것 앞에서 각각의 삶이 맺어놓은 매듭을 하나하나 매만져가며 잠시라도 고개 숙이고 침묵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는 것, 서로의 눈물을 바라보고 닦아줄 수 있다는 것, 나직한 목소리로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사소하지만 소중한 몸짓들은,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 인간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가장 고귀한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온몸 구석구석, 세포 저 아래까지 진득하게 녹아 꿈틀대고 있는 삶과 기억마저도 순식간에 소비하여 산포하고 생산을 향하여 전진하도록 등을 떠민다. 그러나 애도에 소요할 만한 적정 시간이란 것은 누가 정한 것일까. 사회는 애도의 방식 또한 양식화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유로운 존재의 존재를 구겨 넣으라며 폭력을 휘두른다. 망자가 남은 이의 여생에 남기고 간 존재의 흔적을 그 안에 온전히 먹어 들이고, 들숨과 날숨, 느린 호흡의 박자를 맞추며 가만히 곁에 머물러주는 분위기에 젖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기만 하다. 숨을 헐떡이며 힘겨워하는 그 어느 때에도 표출은 금기다. 말하고 싶어도, 울고 싶어도, 결국은 참아야 한다. 침묵해야 한다.


이 도시에는 함께 걸었던 생, 그 우발적 산책길에 마주한 순간을 떠올리며 거닐어볼 시간이 없다. 공간도 없다. 기억의 주름을 세세히 펼치고 떠오르는 희로애락의 환영을 가벼이 밟아보며 잠시잠깐이라도 현실로부터 길 잃을 자유가 없다. 미로가 없다. 발걸음에 걸리는 기억의 방울방울, 때로는 톡톡 터뜨려가면서 구겨지고 생채기 난 마음을 어루만질 산책길이 없다. 떠나간 이가 그리고 간 시공간의 그림자. 산 자가 떠난 자의 죽음을 거닐며 마음을 내려놓고 쉴 공간이 없다.


“죽은 자가 누울 자리는 산 자들이 결정하지만, 산 자들의 삶의 방향은 죽은 자가 제시할 수 있다”고 했던가. 죽음은 더없이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이다. 빛나는 여름으로 질주하는 이 계절, 자연의 속도에 무력으로 저항한다. 죽음을 숙고한다.


시간의 매듭,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의 사회는, 우리의 도시는 어떤 모습을 그려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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