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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물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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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Feb 03. 2024

물의 건축

연재를 시작하며

개인적 체험: 물 이야기

저는 물과 연이 특별한 편입니다. 유아 때 수영을 시작해 10대 시절까지 선수생활을 했고, 이후 한참 동안 물을 미워하다가 프리다이빙으로 물과 화해한 후 프리다이빙 강사가 되었거든요. 물을 미워한 오랜 시간 동안 저는 물의 저편 뭍에서 건축 공부를 했고, 교육활동과 연구활동으로 먹고살았습니다.

물속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첫 기억은 너 다섯 살 때쯤의 수영장에서 입니다. 5초 정도 이어지는 이미지로 남아 있는 그 장면은 이렇습니다. 꼬맹이인 제가 물속에서 발장구를 치며 헤엄치고 있습니다. 고개가 물 아래위로 오가며 시야에 물방울이 튀어 보이는 것들이 흐릿했다 선명했다를 반복합니다. 지금에서 거기가 어디었는지 알 방도는 없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알고 계실 텐데,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장면 이후로 남아 있는 물속 기억은 거의 대부분이  '훈련' 상황입니다. 왜 하는지는 몰랐지만 (아직도 왜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부모님께 한 번도 여쭤본 적이 없네요. 왜 수영을 하게 됐는지.)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크게 이유를 묻지 않고 성실한 편인 저는, 방과 후 하루 기본으로 서너 시간, 매일 수영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영법은 너무 어릴 때 배워서 그런지 크게 연습한 기억이 없고 주로 했던 종목별 기본 훈련은 소위 '뺑뺑이'였어요.

한 레인을 잡고 물에 들어가면 수도 없이 돌았던 기억이 납니다. "더! 더! 더! ", "빨리빨리!", "어이어이!" 물속에 있어도 몸이 열기로 후끈대고 코치의 외침이 귓가에 웅웅댑니다. 힘들어서 물에서 코피가 난 적도 있지만 고개를 물밖으로 내며 멈추면 킥판이 날아오던 시절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대회 출전(혼계영 종목인 듯합니다.) 4번 레인 출발 선수가 저입니다.

학교에는 수영부가 있었고 학교를 대표해서 대회에 출전하고 입상도 많이 했습니다. 꼬맹이 때라 그런지 종목도 거리도 딱히 가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시키는 대로 할 뿐. 그래도 더 잘했던 종목은 접영과 자유형이었어요.

그러나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자라나면서 수영이 싫어졌습니다. 훈련 시간과 강도가 점점 더 세졌고, 저는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놀고 싶었거든요. 다른 친구들은 다른 학원도 가고, 밖에서 고무줄 뛰기도 하는데, 전 늘 수영장에 가야 했으니까요. 너무 가기 싫을 땐 가끔 몰래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너무 재밌게 논 나머지 훈련시간을 놓친 척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그러면 잡혀 와서 다시 수영장으로 가야 했지만, 그렇게 놀았던 기억은 여전히 즐겁습니다.

가장 부러웠던 것은 주말에 엄마와 목욕탕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매일 수영장에 가는 저는 사실 목욕탕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매일 물에서 생활했으니까요. 더군다나 제가 다니던 그 수영장에는 샤워뿐 아니라 작은 탕과 사우나까지 있어서 원하면 탕에 들어가면 되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목욕탕'이란 곳에 가보고 싶어서 하루는 어머니에게 나도 목욕탕 가고 싶다고, 데려가달라고 떼를 쓰며 엉엉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목욕탕이라는 공간에 가고 싶다는 것보다 그 친구들이 자기 엄마랑 같이 시간을 보내며 무엇인가를 했다는 그 사실이 부러워서였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때의 제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렇게 떼를 썼던 때가 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던 때쯤, 이제 수영을 그만하고 공부에 집중하자는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나에겐 왜 의사결정권이 없을까' '왜 나에게 더 하고 싶냐고 물어보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왜 그랬는지, 역시 저는 더 여쭤보진 않았어요. 그때부턴 수영생활은 그만두고 공부만 했지요.


자라난 물 혐오증

스무살이 넘고 성인이 되자 간간히 물놀이 여행을 가자는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여름이니 어느 바다에 어떻게 놀러 가자는 식이었죠. 그 순간마다 전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물에 들어가는 걸 생각하면 몸이 굳는 것 같았거든요. 수영장에서 훈련받으며 수없이 '뺑뺑이'를 돌던 때가 생각이 났는데, 그러니 '굳이...' 하는 생각에 물 근처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냥 싫었어요.

그렇게 여름마다- 모래사장도 딛지 않고 멀리서 바다를 물끄러미 보던 것이 스무 번 넘게 지나갔습니다. 혹 리조트에 갈 일이 있어도 수영장엔 가지 않았습니다. 물을 기피하던 그 시간 동안 저는 박사학위를 받고 뭍에서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연구도 하고 강의도 했지만 20년이 훌쩍 넘는 그간의 세월은 아무리 가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태풍이 끊임없이 몰아치는 것만 같던 시간이었어요. 허리케인에 휩쓸린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가 된 것 마냥 빠져나오고 싶어도 바람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2022년 1월- 새해를 시작하며 문득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보자는 다짐을 했어요. 우연히 집 가까이에서 프리다이빙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체험해 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간 오래 물에 안 들어갔으니 이번엔 들어가 보자는 생각,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프리다이빙- 뭔지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그해 1월 22일, 처음으로 프리다이빙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5미터 다이빙풀에 들어갈 때, 제 나이만큼의 세월이 전광석화로 저를 훑고 지나가는 경험을 했거든요. 코치들의 외침과 간간히 훈련 가기 싫다고 실랑이하던 저의 내적 자아들. 대회 때마다 느끼던 스릴과 긴장감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며 빠르게 지나갔어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커다랗게 진득한 기억의 껌딱지들이 몸 여기저기 붙어 있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러나 숨을 참으며 순간에 집중하는 동안 그 기억들은 서서히 가라앉았어요.


2022년 1월 22일, 첫 프리다이빙 수업에서 프리이머전 중
2022년 1월 22일, 첫 프리다이빙 수업 영상

수업에서 프리다이빙은 수영과 완전히 다른 지점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수영에서 더! 더! 더! 빨리 돌라는 주문은 프리다이빙에는 절대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주문은 더 느리게, 더 평온하게로 바뀌었어요.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정도가 아니라 서두르지 않아야만 하는 활동. 흥분하고 들뜨면 될 것도 더 안 되는 이상한 물놀이. 그렇게 프리다이빙으로 물 혐오증을 치료하고 프리다이빙 강사가 되었습니다.


프리다이빙과 물의 건축

프리다이빙 강사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테스트를 통과해야 합니다. 본인의 관심 분야 내에서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스페셜 프레젠테이션도 진행해야 하고요.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주제를 생각해 보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물의 건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물을 담는 인공적인 공간들이 건축이란 이름으로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때 준비하여 동료들과 함께 나누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좀 더 심화하여 연재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2주에 한 번씩(가끔 더 늦어질지도 몰라요) 총 10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며,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프리다이빙의 역사 - 고대에서 근대 이전

2. 물을 담는 건축: 욕장에서 수영장까지

    2.1. 고대의 수공간

    2.2. 수영장 건축

    2.3. 영화 스튜디오 탱크 시설

    2.4. NASA 소니 카터 훈련센터

    2.5. 아쿠아리움

3. 프리다이빙 건축공간

    3.1. 세계의 딥다이빙풀

    3.2. 국내 딥다이빙풀


목차와 내용은 세부적으로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으나 대략의 그림입니다. 각각의 꼭지에서는 각 공간의 건축적 특징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그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이론적 개념들과 이슈들도 함께 다루어볼까 합니다.


어릴 적 수영장에서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물에 들어가 잠시 놀면서 손에 물을 담아보곤 했습니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모아 담고는 조금씩 흘러나가는 걸 잠시 지켜보는 거예요. 요즘엔 가끔 물을 담은 컵, 국을 담은 그릇, 물을 담은 수영장과 다이빙풀, 아쿠아리움과 보, 저수지, 하구둑을 거쳐 바다를 담은 지구… 이리저리 조금씩 조금씩 스케일을 키워보며 생각의 놀이를 합니다.


글을 준비하고 나누는 시간 동안 이참에 우리 주변에 물을 담은 공간들을 다시금 바라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함께 가져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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