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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Feb 08. 2024

프리다이빙의 역사(2)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오늘날에는 프리다이빙을 비롯한 많은 수중레저스포츠가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는 취미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주 먼 옛날에는 어땠을까요.

상상해 봅니다.

더운 어느 여름날을 보내는 신석기시대인들이 있습니다. 해변에서 놀면서 수영하러 바다에 들어가기도 하는 이 시대 우리들처럼 물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중 누군가는 순간 숨을 참고 이리저리 물속을 오가며 바다생물들을 살펴보았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제 경험상 마스크 없이 바닷물에서 눈을 오래 뜨고 있는 건 어려우니까 신석기시대 사람들이라고 해서 별 다를 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오염 없던 고대의 깨끗한 바다라 해도 염분 때문에 몇 번 눈을 깜빡여보다가 따가워서 금방 올라오지 않았을까요.

때에 따라서는 물고기나 소라를 잡으려고 물에 들어갔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프리다이빙 낚시는 눈을 보호하지 않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야가 제한적입니다. 게다가 겨울이라면 추정하기로 약 15분이 지나면 저체온증의 위험이 있다고 해요. 그러니 오늘날처럼 웻슈트에 마스크를 쓰고 눈 따가움 없이 바다를 즐기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날 프리다이버는 개인 능력에 따라 몇 미터에서 수십미터 깊이로 쉽게 다이빙하고 수중에서 다양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자 파월(J. Powell)에 따르면, 고고학적 증거들로는 프리다이빙이 있었는지, 어떻게 존재했는지 식별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필요한 장비가 있었다면, 종종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는 추가 중량 역할을 하는 돌, 칼, 바구니 정도로 제한적이었을 텐데(Powell, J. (1996). Fishing in the prehistoric Aegean (No. 137). Coronet Books.), 그렇다고 해서 돌, 칼, 바구니와 같은 고고학적 증거들이 프리다이빙을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되기 힘들다는 것이죠.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바닷물은 순수한 물이 아니라 다양한 무기염료들이 용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민물에 비해 밀도가 높고 무거워집니다. 이 말은 뜨려고 하면 민물에서보다 바닷물에서 더 잘 뜬다는 뜻이 되지만, 깊이로 들어가려고 하면 민물보다 더 힘이 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떤 깊이가 되었건 물속으로 들어가려는 프리다이버는, 따라서 원하는 깊이에 힘을 덜 들이며 쉽게 들어가기 위해서 중량을 더해 부력을 조절합니다. 요즘엔 납으로 만든, 허리에 차는 웨이트벨트나 목에 차는 넥웨이트가 그 역할을 합니다만, 고대에는 돌멩이나 적당한 크기와 무게의 바위덩어리를 썼을 거예요.

밑으로 내려가는 다이버(저예요) 목에 살짝 보이는 핑크색 장비가 약 1.5kg 넥웨이트입니다.

고고학적 증거에 돌멩이가 있다?! 이건 프리다이빙의 직접적 증거가 될 수도 있지만, 사실 크기나 무게에 관계 없이 돌이나 바위는 바닷가 근처 곳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건 21세기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제주도 바다를 생각해보면 확실한데, 요즘도 마찬가지이지요.

바구니가 발견되었다고 해도 손으로 짠 바구니는 바다를 오가며 소금기로 인해 쉽게 부패하거나 상했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플라스틱이나 신소재 바구니는 없으니 낚시용이 아니더라도 어찌 되었든 자주 다듬고 만들어야 했을 거예요. 게다가 꼭 다이빙으로 바다에서 식량을 수집하는 데에만 썼을 것이라는 논리는 세우기가 힘들겠지요.

당시 돌을 갈거나 날이 서도록 부셔뜨려 만든 칼은 두말할 나위 없이 수렵과 채집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됩니다.

이러하다보니 고고학 그리고 인류학 연구들은 다음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1) 고대 유물로 발견되는 돌, 바구니, 칼 등의 장비들이 프리다이빙을 통한 수집, 채집용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2) 상황이 그러하여도 마음 먹으면 신석기시대 연안 주민들은 장비 없이도 프리다이빙을 통해 생존을 위한 식품 목록을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요.(Galili, E., Zemer, A., & Rosen, B. (2013). Ancient fishing gear and associated artifacts from underwater explorations in Israel–a comparative study. Archaeofauna, 22(145), e166.) 

결국 이럴 수도 있었을 테고, 저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는 말을 앞뒤로 좀 길게 했을 따름이지만,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니 꼭 이러했다 명확히 아는 것보다 흥미롭기도 합니다.

고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 프리다이버가 있었다면 오늘날 해녀들이 그러하듯 바위 틈 사이나 해초 사이에 숨은 물고기와 소라, 조개와 같은 해양생물을 수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식용자원이 풍부한 바다에서 수중 지형에 익숙한 다이버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양의 식량을 수집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족 구성원을 먹여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을 바다에서 가져올 수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당시 프리다이버는 저체온증을 감수하고서라도 프리다이빙을 하고 식량 수집을 했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중 일부는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고요. 알 수 없는 것들은 합리적 추론 혹은 상상의 영역이라는 애매모호한 두 영역의 교집합에 남겨두고 넘어가겠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중심 지역에서 발전한 문명입니다. 단어 'Μεσοποταμία'는 그리스어로 '강들의 사이'를 의미하며, '중간'을 나타내는 '메소스(μέσος)'와 '강'을 의미하는 '포타무스(ποταμός)'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랍어로는 'بلاد الرافدين' 또는 'بین النهرین' (bilād ar-rāfidayn), 페르시아어로는 'میان‌رودان' (miyān rudān)으로 표현되며, 이 모든 언어에서 의미는 동일합니다.

이 문명은 세계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고 도시국가를 세워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그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아카드, 아시리아, 고바빌로니아, 신바빌로니아 등 많은 왕조들이 번영하고 망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크고 다양한 문화권 간의 교류로 많은 후대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집트 문명과 함께 서양과 중동 문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역사적으로도 불가사의를 남기며, 바빌론의 공중정원, 이슈타르의 문, 바벨탑 등이 유명합니다. 특히 바빌론은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고대 세계 최고의 도시로 알려졌으며,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교차하는 중요한 교차로 역할을 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메소포타미아는 현대에는 사막화가 진행된 지역이지만, 과거에는 매우 비옥하고 넓은 토지로 알려졌습니다. 이 지역은 현대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 튀르키예, 쿠웨이트, 이란 일부를 포함하며, 초기 인류 문명의 중요한 발전지였습니다. 농업, 장거리 무역, 전쟁, 문학, 문자 등의 여러 분야에서 문명이 발전했습니다.

바로 이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45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둥껍데기를 발견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이 껍데기가 다이빙으로만 채집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고대 우르 조개 램프 혹은 신주 용품. 이미지: 대영박물관

현대 이라크의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우르 왕릉에서 발견된 이 고둥껍데기는 1927-1928년의 우르 발굴 시기에 발굴되어 현재는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할당된 유물 중 일부입니다. 아카디안 시대에서부터 신(neo)수메르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2300-2100년에 속하는 것으로, 한쪽 끝(위쪽)은 새의 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었으며, 새의 눈 부분은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청금석)'로 장식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유물의 용도는 심지를 달고 기름을 담아 불을 켜는 램프였거나, 신에게 술을 바치는 신주(헌주) 의식에서 술을 따르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용도는 그렇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물건이 고둥! 고둥껍데기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바다에 숨을 참고 들어가서 주워왔다는 거죠. 프리다이빙을 했을 거란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지점입니다.

표범 형태의 메소포타미아 조개 부적. 이미지: Artemis Gallery, Lot 43, Auction 4/6/2023

또 다른 예로, 기원전 3300년에서 1800년 사이, 고대 근동과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후기 우룩(Uruk)에서 발견된 한 쌍의 표범 부적이 있습니다. 이 부적들은 조개를 활용하여 길쭉한 몸을 뒤로 젖힌 모양으로 만든 조각품입니다. 표면에는 점박이 패턴으로 얕은 구멍들이 뚫려 있으며, 아마도 상감 기술을 적용했거나 대조적인 색상으로 칠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부적 모두 끝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어 펜던트나 호신용 부적으로 착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원 제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역시나 중요한 점은 이 표범 모양 부적이 조개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만, 여기서 잠시 표범을 살펴보겠습니다. 표범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표범은 사냥 능력과 아름다운 가죽으로 인해 선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수메르 신화에서 하늘의 여신이자 풍요와 다산, 전쟁을 주관하는 이난나(혹은 인안나) 여신과 같은 신들과 연관되어 보호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난나 신화에서 여신은 산 속에 사는 표범 혹은 아누나 신들 사이의 표범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난나 여신 부조. 이미지: 대영박물관
 기원전 650년 경으로 확인된 아시리아 점토판. 이 점토판에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대영박물관

우룩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쉬에 관한 영웅서사시로 호메로스의 서사시보다 1500년 가량 앞섰다고 알려진 길가메쉬 서사시에는 길가메쉬의 친구이자 전장의 동료로서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전설적 인물 엔키두(Enkidu)가 등장합니다. 그의 위용을 그리며 시의 화자는 그를 '광활한 공간의 표범'으로 묘사합니다. 기원전 1074/3년경부터 1056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의 왕으로 재위했던 아쉬르벨칼라(Aššurbēlkala)는 자신의 백성들이 그를 우러러보고 감탄할 수 있도록 표범 부대를 이끌었으며, 다른 아시리아 왕들과 페르시아 왕들은 표범을 사냥했습니다.(Galik A. Horejs B. & Nessel B. (2013). Der nächtliche jäger als beute. studien zur prähistorischen leopardenjagd. Praehistorische Zeitschrift. https://doi.org/10.1515/pz-2012-0017) 

표범이 그만큼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대단하게 여겨졌다는 뜻인데, 표범 이야기를 길게 하긴 했지만, 앞서 말했듯 이것이 조개를 사용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고대인이 조개 채집을 위해 물에 들어가 숨을 참고 다이빙을 하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증거로는 '우르의 깃발(Standard of Ur)'이 있습니다. 1928년에 영국의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 경이 우르 왕실의 묘지를 발굴하던 중 이를 발견했으며, 현재는 영국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2600년에서 2400년 사이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 나무판 위를 유리와 조개 껍데기로 장식하여 전쟁의 승리를 기념한 것입니다.

우르의 깃발. 이미지: 대영박물관

상자에 박힌 장식판은 총 두 개입니다. 각각의 판에는 인물과 동물이 있는 장면들을 묘사한 세 개의 수평층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아래에서 위로 차례로 펼쳐지며, 각 층은 시각적으로 특정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장식에 사용된 재료는 진주조개 껍데기, 붉은사암, 그리고 청금석입니다.

진주조개 껍데기는 나전칠기 방식처럼 인물을 형상화하여 사용되었고, 검은색으로 세부를 표현했습니다. 청금석은 배경에 사용되었고, 붉은사암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쓰였습니다. 역시나 이 작품에 사용된 진주조개는 꽤 깊은 곳에서 살고 있기에 고대인들이 프리다이빙을 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고대 언어에도 다이빙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요. 수메르어에서 'ñiñri'는 다이빙을 의미하며, '침몰하다', '가라앉다'를 뜻합니다. 물 아래로 들어갔다는 증거가 말에 남아 있는 셈이죠.


이제 이집트로 가보겠습니다.

기원전 3200년경 이집트의 VI왕조 시기 테베에서는 조개 장신구가 인기 있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간조 때 수집한 별보배고둥의 수요가 높아 이들 수집이 활발했습니다. 별보배고둥은 부적 또는 장식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목걸이가 남아 있습니다. 저도 지난해 여름 필리핀에 갔을 때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별보배고둥 목걸이 같은 관광 기념품 목걸이를 기념품 가게에서 본 적이 있어요.

반면에 입뿔고둥은 염료 제조에 사용되었고, 진주조개는 장식 목적으로 채집되었습니다. 조개와 해삼도 채집과 교역의 대상이었습니다. 기원전 2686년에서 2181년 사이, 고대 왕국 시대에 홍해의 해양 물품들은 교역의 주요 대상이었던 것이죠.

테베에서 발견된 금과 준보석으로 만든 별보배고둥 부적 목걸이. 이미지: 대영박물관
붉은색 염료 제조원 입뿔고둥.

조개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필요 없는 조개들 또한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조개들은 단지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요새를 쌓는 데에 사용되기도 했다는 것이 지난 2009년에 밝혀졌는데요. 이집트 시나이 사막에서 발견된 진흙 벽돌과 조개껍데기로 이루어진 유적에서 15미터에 달하는 두께의 진흙벽이 조개껍질로 보강된 사실이 발견되면서, 고대인들이 조개를 토목, 건축영역에 활용한 새로운(?) 방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수에즈 운하의 동쪽에 있는 콴타라에서 발견된 고대 이집트의 요새 '텔 헤부아'.

이처럼 조개가 다양하게 활용되다보니 적어도 누군가는 조개를 수집하고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수중낚시나 프리다이빙은 조개를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법이었을 거예요.

전통적인 유인망 낚시 방식도 일부 프리다이빙을 필요로 했습니다. 낚시망을 깊이 던졌을 때 무언가가 잡혔는지 확인하고, 망이 바다 어딘가에 걸린 경우에는 누군가 물 아래에 들어가 풀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망에 충분히 잡힌 경우에는 망을 끌어올려야 했는데, 이 모든 경우에 때에 따라 다이빙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그림에는 나일강에서의 어업 장면을 묘사한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Anktifi의 무덤(기원전 2100년)에는 유인망 어업을 묘사한 벽화가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볼께요. 누군가는 잡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이빙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배 위에서 대기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어요. 웻슈트를 입지 않아서 좀 춥거나 물벼룩을 스치거나 해파리에 쏘이기라도 했으면 아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에 보이는 사람은 다리가 하늘로 가 있습니다. 다들 배에 있으니 물 위일 것이기 때문에, 다이빙을 하고 있는 장면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프리다이빙을 했을 것이라는 흔적들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이처럼 고대 프리다이빙은 고대 문명에서 수중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수행했던 기술로서 어업 활동, 물 속 자원 수집, 그리고 다양한 수중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 고대 이집트와 같은 문명에서는 어로 활동과 어업을 수행하는 데 다이빙이 빈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거나 얽힌 어망을 풀거나 어망을 끌어올리는 등의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물 속에 직접 들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위험을 수반했습니다. 나일강에는 악어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고 해요.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고대 프리다이빙은 주로 낚시와 어로 활동을 보조하고 바다에서의 삶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를 같이 하려고 했는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내용이 재밌어서 계속 보다보니 실패했습니다. 다음에 하나의 꼭지로 가지고 올께요.


21세기의 프리다이빙 체험을 원하신다면, 알로하프리다이브를 찾아주세요!

고대인들을 상상하면서, 숨을 참는 행위 자체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지만, 21세기의 최신 의학 지식들로 이론을 공부하고 최신 장비들로 안전하고 즐겁게 다이빙을 배워볼 수 있습니다. :D

- 인스타그램: @alohafreedive

- 알로하프리다이브 홈페이지: https://www.kimwolf.com/freed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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