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스릴러 수영 드라마와 산업 잠수의 시작
앞서 고대인들은 수영을 ‘기술적인 예술(art)’로 여기며 이를 정체성 삼아 이방인들과 자신을 구별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요즘처럼 수영장이 어디든 있어 바다나 호수가 가깝지 않은 내륙 지역에서라도 마음먹으면 수영을 배울 수 있지 않았기에, 물 가까이에 살며 수영 능력에 생존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며 살아간 사회는 그렇지 않은 문화와 구별되었을 것입니다. '할 줄 안다'는 것은 '할 줄 모르는 것'에 비하여 '우월함'을 의미했고요. 문화적 정체성과 지리 특성이 지금보다 더 밀접한 관계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으로, 고대 세계에서 지리적 특이성은 문화적으로 계층화된 정체성을 형성하며 중심 대 주변의 세계관을 의미했습니다.(McPhail, C. K. (2016). The Roles of Geographical Concepts in the Construction of Ancient Greek Ethno-cultural Identities, from Homer to Herodotus: An Analysis of the Continents and the Mediterranean Sea (Thesis, Doctor of Philosophy). University of Otago. Retrieved from http://hdl.handle.net/10523/6251)
그리스와 로마 문화 모두 평영, 자유형, 배영과 같은 여러 수영 기술에 능숙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 오디세우스에서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까지, 탁월한 수영 능력을 보여준 인물들도 많이 있습니다.(McManamon, J. M. (2021). "Neither Letters Nor Swimming": The Rebirth of Swimming and Free-diving (Vol. 9). Brill.)
고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호메로스의 유명한 서사시 <오뒷세이아>에 따르면, 쓰리나시아(Thrinacia)에서 오기기아(Ogygia)로 항해하던 중 오디세우스의 배가 벼락에 맞아 난파하여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요정 칼립소가 사는 섬 오기기아까지 수영하여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를 본 칼립소가 그에게 반해버리는 바람에 칼립소에 붙들려 오디세우스는 7년을 오기기아 섬에서 보냅니다. 끊임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오디세우스를 아테나가 도와주는데요. 아테나는 제우스를 설득하고 제우스가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칼립소에게 보내 오디세우스를 놓아주라고 합니다. 헤르메스에게 설득당한 칼립소가 마침내 오디세우스를 보내주면서 오디세우스는 오기기아를 탈출하지만, 그의 배가 다시 난파당하면서 또다시 표류와 모험이 이어지지요.
오늘날 고고학자들 중 쓰리나시아에서 오기기아까지의 거리를 현 지리에 대입해 연구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만, 오디세우스가 과연 실제로 헤엄쳤다면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수영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쓰리나시아와 오기기아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서 거리가 달라질 텐데, 학자들에 따르면 쓰리나시아는 오늘날 몰타(Malta) 혹은 시칠리아(Sicily)와 관련이 있고, 오기기아는 고조(Gozo) 섬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수필모음집 <<모랄리아-강과 산의 유래에 대하여>>에서 북유럽 군도에 존재하는 크로노스 숭배 전통에 대해 논하면서 “오기기아라는 섬은 멀리 바다에 있습니다”라고 했는데요. 이 주장을 따르면 오기기아는 지중해가 아닌 대서양에 위치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입한다면 다음과 같은 거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몰타에서 고조 섬까지를 수영했다면, 수영 거리는 6km. 오늘날 ‘마라톤 수영’이 수영으로 10km를 횡단하는 것으로 육상의 마라톤과 같다는 것을 감안하면 해볼 만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시칠리아에서 고조까지였다면, 수영거리는 93km가 되었을 것이고요. 오기기아가 대서양에 있다고 가정하여 오디세우스가 몰타에서 대서양까지 수영했다고 한다면, 그의 수중 모험거리는 신이적(神異的)으로 늘어나 1,772km가 됐을 것입니다.
얼마 전 실화 바탕의 영화 <니아드>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수영선수였던 다이애나 니아드(Diana Nyad)가 수영을 접은 지 30년이 지나 4전 5기 도전하여 쿠바 아바나 해안에서 플로리다 키웨스트 해변까지 바다수영으로 177km를 횡단한 이야기를 그립니다.
이런 실화를 비추어보면 6km는 간단히 가능했을 것 같고, 어쩌면 진짜로 바다 거리로 93km 정도를 수영해서 건너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약 스무 배 부풀려지면 1,772km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거고요. 글을 쓴 호메로스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부터가 상상인지 알고 있겠지요?!
저도 지난해 초가을 아침, 바다수영을 즐겨하는 남편 지인의 안내로 남편과 함께 광안리 해변에서 광안대교까지 왕복 2.5km 정도 되는 거리를 수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보는 일출 광경이 놀라웠어요. 차로만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광안대교 아래에 수영해서 떠 있는 느낌도 신기했고요.
이렇게 보니 고대 대서사시 주인공의 행적을 짐작해 보는 데 실제 경험이 쓰일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해보니 저에게 광안리 바다에서 2.5km 바다수영은 그렇게 힘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마 날이 좋았고 너울도 심하지 않아서였겠지요. 남편이 종종 하는 말 입니다만, 할까 말까 고민될 때에는 해보는 편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해보면 적어도 어떤지 실제로 알게 되니까요.
수영을 잘한 고대 로마 역사 속 인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대표로 들 수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를 보고 반해버린 카이사르가 왕위 계승 싸움에 휘말리며 발발한 알렉산드리아 전쟁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이 전쟁 도중 이집트인들에게 추격당하여 침몰하는 배로부터 도망치면서 손에 들고 있는 편지를 물 위로 들고 다른 배로 수영해서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면서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성들만 수영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성들도 수영을 할 수 있었음을 전해오는 이야기들로 알 수 있습니다. 대표로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예로 들 수 있는데요. 아그리피나의 수영 이야기는 네로 황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네로 황제는 워낙 유명하여 다들 잘 아실 거예요. 취임 초에는 인기가 있었지만, 후에 국고를 낭비하고 가족을 살해하며 잔인하게 그리스도 교인들을 박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는 수영을 잘하였으나, 그녀가 수영을 잘할 수 있었다는 기록은 네로의 잔인성을 드러냅니다.
(출처: 튀르키예 Museum in Aphrodisias)
네로가 황제가 된 후 20대 초반, 포페아라는 여성에게 빠지게 됩니다. 네로는 정략결혼을 한 상태로 이전에 만난 아크테라는 해방노예에 싫증이 난 상태였고, 포페아의 경우 첫 남편과 이혼하고 두 아이가 있었지만 오토와 재혼하고 싶어 하던 때였습니다. 네로는 포페아를 차지하기 위해 오토를 멀리 포르투갈로 보내버리지만, 포페아는 여전히 네로의 애인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녀는 애인이 아닌 아내가 되고 싶었거든요.
결국 네로는 정략결혼자인 옥타비아와 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정략결혼으로 네로가 황제가 될 수 있었기에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이 결정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이자 나르시시스트 범죄자 성향의 네로는 원하는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방법은 호화스럽고 치밀했습니다. 별장에서 잔치를 열어 어머니를 초대한 후, 침몰하도록 조작한 배를 선물로 바쳐 어머니를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수영을 잘했던 아그리피나는 배가 침몰할 때 살아남게 되고, 어머니가 살아남았음을 알게 된 네로는 결국 사람을 보내어 어머니를 시해합니다. 네로는 서기 68년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선포된 후 30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물놀이나 개인적인 건강관리의 차원을 넘어 치정과 난파, 인생의 소용돌이와 같은 대서사적 위험을 피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극적으로 등장하는 수영입니다. 장편 대서사의 스토리가 워낙 드라마 그 자체로 강력하여 오늘날까지도 전해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프리다이빙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인들의 경우 여러 방면에서 그리스인들보다 더 ‘실용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에서의 기술에서도 그랬습니다. 앞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오늘날 여전히 해녀가 존재하듯, 해산물 수집을 위해 다이빙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천연해면을 수집하여 공급하는 상업 목적이 톡톡했다는 점을 보았는데요. 해양문화를 탐구하는 고고학자들은 로마의 경우, 이와 유사하면서도 고대 그리스보다 더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Oleson, J. P. (1976). A Possible Physiological Basis for the Term urinator," Diver". The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97(1), 22-29.)
남아 있는 기록들에서 추정컨대 당대 전문 다이버들이 잠수했던 깊이는 오늘날 프리다이빙에서 일반적인 레크리에이션 다이빙 깊이인 30-40m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프리다이빙 목적의 경우, 티베르 강이나 바다에서 식량으로서 해산물 수집 목적은 물론, 공화정 후기나 로마제국 시기에 들면서 교각이나 항구 건설 작업량이 증가한 만큼 건설 작업 중 물에 잠기는 부분을 다루는 다이버들 또한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특히 2세기 중반에 발견된 기록에 따라 로마제국의 부가 집중되었던 오스티아 지역에 이런 다이버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는데요. 당대의 전문 다이버들이 만든 길드 ‘코르푸스 우리나토룸(Corpus Urinatorum)’에 관한 기록이 있기에, 다이빙 관련 사업을 확장하는 데 서로가 힘이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또한, 강이나 항구에서 작업하는 다이버들 중에는 무역을 하면서 배에서 물건을 오르내리는 중에 물에 빠진 물건을 건지는 일을 주로 했던 다이버들도 있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작업을 하는 다이버들이 있습니다. 소위 '펀 다이빙'이 아닌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입니다. 국내에서는 ‘산업잠수사(Industrial Engineer Diver)’라고 부르며, 정식명칭은 '잠수산업기사'입니다. 잠수장비를 사용하여 바다나 댐, 강 등의 수중에서 각종 공사 또는 연구조사 등의 직무를 수행하는 잠수사로서 국가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수중 구조물, 장비, 및 시설물의 검사를 통해 손상, 부식, 또는 오작동의 징후를 확인하고, 부품을 청소, 수리, 또는 교체하는 등의 일상적인 유지 보수 작업을 수행합니다. 또한 파이프라인, 해상 플랫폼, 수중 케이블, 교량, 댐 등 수면 아래 다양한 구조물의 시공 및 설치에 참여하며, 특수 공구와 기술을 사용하여 물속에서 금속 구조물, 파이프, 또는 수중 장비를 용접하거나 절단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요. 물체를 인양하거나 비파괴 검사를 수행하여 수중 구조물의 안전성과 품질을 평가하고, 수중 조사, 지도 제작, 유해물질 제거, 정화 등의 작업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작업은 프리다이빙으로는 어렵고 스쿠버 다이빙으로 가능합니다. 물속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고 안전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고대 로마 시대에는 현대적인 스쿠버 다이빙 장비가 없었기에 프리다이빙 기술이 필수적이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속이 빈 갈대를 스노클로 사용하여 물속을 탐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속이 빈 갈대를 장비로 사용한 다이빙 문화는 오늘날 호주 깁스랜드의 구나이쿠르나이 원주민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합니다.(Cumpston, Z. (2020). Indigenous Plant Use: A Booklet on the Medicinal, Nutritional and Technological Use of Indigenous Plants. Clean Air andUrban Landscapes Hub, The University of Melbourne, Victoria, Australia. p.12) 그러나 다이빙의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주요장비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이지요.
그런가 하면 예술활동에도 다이빙이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 있습니다. 2023년 12월, 로마에서 새롭게 공개된 유적인데요. 조개껍질과 산호로 만들어진 2,300년 된 모자이크가 발견된 것입니다. (뉴스 원문보기: https://www.cnn.com/style/rome-palatine-hill-archaeology-discovery) 이 모자이크 장면은 거의 5미터(16.4피트)에 이르는 길이로, 덩굴, 연잎, 삼지창 등 신화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진주, 조개 껍질, 산호, 귀중한 유리 조각, 대리석 조각 등이 사용되어 정성스럽게 제작되었으며, 다양한 색상의 보석과 이국적인 고대 이집트의 파란색 타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콜로세움 고고학 공원의 책임자인 고고학자 알폰시나 루소는 이 모자이크의 놀라운 보존 상태에 감탄했고, 장식이 해전과 육지 전투의 축하 장면도 포함하고 있는 만큼, 이는 승리를 기념한 매우 부유한 귀족 후원자가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로마의 언어였던 라틴어에서 "우리나토르(Urinator)"라는 단어는 다이버를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물속에 있다"는 의미의 동사 "우리나리(Urinari)"는 원래 "물"을 의미하는 “우리나(Urina)”에서 유래했고 나중에 "소변(Urine)"으로 의미가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이 라틴어 어원은 그게 맞다 아니다에 관련하여 최근 논쟁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만 여기선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만, 다이빙과 소변의 관계라 하니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인간은 포유류의 한 종으로, 과거 진화 과정에서 물 속에서 생활했던 기억 체계를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물 속에 들어가면 포유류 잠수 반응(Mammalian Dive Reflex, MDR)이 발생하여 더 오래, 더 깊이 내려갈 수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동물들과 비교했을 때는 낮은 수준이지만요.
포유류 잠수 반응은 모든 포유류가 물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생리적인 반응을 의미합니다. 이 반응에는 서맥효과, 비장 효과, 혈액 이동 등이 포함됩니다. 다이빙을 하면 신체는 이 포유류 잠수 반응의 혈액 이동 효과로 인해 체액을 몸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고, 그로 인해 자꾸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거든요. 다이빙을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상태로 몸이 바뀌는 과정이니 마음으로 반갑게 맞으면 되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강사에게 말하고 다녀오면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대 세계의 수영 문화에서 시작하여 고대 로마의 프리다이빙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고대 로마에서 물을 담은 여러 가지 도시건축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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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이빙을 배워보고 싶으시다면,
- 인스타그램: @alohafreedive
- 알로하프리다이브 홈페이지: https://www.kimwolf.com/freedive
(**수영 강습도 합니다. 물이 무섭다거나 한 번도 물에 떠본 적 없다 하시는 분들도 한 시간이면 수영할 수 있게 해드려요. 할까 말까 고민될 때엔 해보는 걸로! 해보면 정말 할 수 있구나 알게 되실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