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
빗물. 샘물. 바닷물. 지하수... 때때로 흐르는 눈물까지(feat. 난... ㄱ ㅏ끔... 눈물을 흘린 ㄷ ㅏ ....). 물은 어디에나 있는 듯하지만 모아서 필요할 때 쓸 수 있게 만들지 않으면 일상이 매우 괴로워질 수 있습니다. 요즘엔 길을 걷다가도 급하게 목이 마르면 편의점에 가서 작은 물 한 병 사마시면 그만이지만, 만약 그 상황에 카드도 현금도 핸드폰도 없다?! 당장 마실 물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위급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일상에서 중거리 달리기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나왔다가 멀리 걷게 된 어느 산책길에서 충분히 맞닥드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한 방울 한 방울 물을 모으면 필요할 때 물을 쓸 수 있게 됩니다. 목욕탕에, 수영장에, 다이빙풀에 몇 톤에 달하는 물을 모아 행위에 맞게 활용할 수도 있게 되고요. 그러나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길을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물은 늘 여기저기 있는 듯하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시스템 덕분입니다. 물을 활용한 건축이 있기에 앞서, 물을 활용하기 위한 시설이 먼저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물을 사랑한 로마인들이 일상에서 물을 활용할 수 있게 하기 구축한 송수로 시스템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은 지하수를 활용한 인류 문명사의 초기 사례 중 하나입니다. 일부는 지표수를 통해 공급되었지만 대부분의 수원(水原)은 샘물이었으며, 보통 지하수 유량을 늘리기 위해 터널링으로 보강되었습니다.
여행 혹은 역사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고대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Ancient World)’라고 들어보셨을 텐데요. 오늘날 “미쉐린가이드”나 “00 선정 몇 대 핫플”. 이런 식으로 순위를 매기거나 선정하는 것의 원조 격입니다.
고대 7대 불가사의라는 용어는 그리스 역사철학가인 디오도로스 시큘루스(Diodorus Siculus)가 기원전 1세기에 처음 언급했습니다.(Siculus, D. (1814). The Historical Library of Diodorus the Sicilian. Рипол Классик.). 원래는, 요즘 말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과 일맥상통한 “반드시 봐야 할 것들(Things to be seen)”이란 표현이었지만, 후대 역사학자들이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정착시킵니다.
목록에는 이집트의 쿠푸왕 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바빌론의 공중 정원,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할리카르나소스의 무덤기념물 마우솔레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그리고 로도스 섬의 거대한 청동상이 포함되는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선정 시기가 100-200년 늦어졌다면 분명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이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했습니다(Deming, D. (2020). The Aqueducts and Water Supply of Ancient Rome. Ground water, 58(1), 152.).
로마의 정치가이자 박물학자, 백과사전 편집자인 대(大)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23년-79년)도 그의 저서 <<자연사>>에서 로마의 송수로를 “비교할 데 없이 비상”하다고 극찬합니다(Ibid. p.352).
공공의 목적으로 수영장, 연못, 운하, 가정용수, 정원, 교외 및 시골 저택에 물을 풍부하게 공급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거쳐야 하는 거리와 지어진 아치 수로교, 산을 꿰뚫고 평탄화 작업을 거친 계곡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감탄을 자아낼 만한 것이 더 이상 없음을 필연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Secundus, G. P. (1857). The Natural History of Pliny (Vol. 6). Henry G. Bohn. pp.353~354)
(이미지: Mary Evans Picture Library Ltd/age fotostock(좌측), The British Library(우측)
다른 이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거주했던 그리스의 수사학자이자 역사가 헬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소스(Dionysius of Halicarnassus, 기원전 60년-7년)는 로마의 포장도로와 하수구와 함께 송수로 시스템을 “로마에서 가장 웅장한 세 가지 중 하나”로 평가합니다. 엄청난 비용을 국가에서 감당하여 건설함으로써 물을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으로 끌어와 로마인들의 생활의 편리를 북돋은 수로는 “로마 제국의 위대함”그 자체였다고 하지요(Cary, E. (1937). The Roman Antiquities of Dionysius of Halicarnassus: in 7 volumes. p.129).
그리스 지리학자이자 역사가 스트라보(Strabo, 기원전 64년-24년) 또한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요. “수로에서 공급되는 물이 풍부하여 마치 도시와 하수도를 흐르는 강과 같으며, 거의 모든 집에 송수관과 분수가 갖추어져 있다”라고 언급합니다(Strabo, R., & Duane, W. (1917). The geography of Strabo. (No Title). p.350).
<<로마 제국의 몰락과 패배의 역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의 저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은 로마의 수로를 “사업의 대담함, 실행의 견고함, 그리고 그것이 제공하는 활용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로마의 천재성과 권력을 드러내는 가장 웅장한 기념물 중 하나”로 묘사합니다(Gibbon, E. (1845).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Vol. 2). Harper & Brothers. p.70). 산업혁명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는 고대 로마의 수로 시스템을 능가하는 급수 시스템이 건설되지 못했습니다(Oleson, J. P. (Ed.). (2008). The Oxford Handbook of Engineering and Technology in the Classical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 p.312).
비트루비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 당시 파노에 바실리카를 세우고 기원전 33년부터 <<건축십서>>로 더 잘 알려져 있는 <<De Architectura 10권(건축에 대하여)>>을 써서 아우구스투스에 헌정한 것으로 유명한 로마 건축가입니다. <<건축십서>>는 현존하는 고대 유일의 건축서적으로 2,00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출판되고 있어요. 저도 두고두고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 열어 몇 번 읽어보았습니다. 명확하지 못한 서술도 많지만 건축기술 이외에도 토목, 기예, 조병, 건축, 미학도 포함되어 있어 당대의 삶을 연구하고 짐작해 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책에 로마 수로에 대한 기록 또한 남아 있습니다.
물은 로마 문화에서 중요했습니다. 비트루비우스는 물이 무한하게 펼쳐지는 실용적 필요를 채워준다고 하면서 “모든 것이 물의 힘에 의존한다” 말했습니다(Rowland, I. D., & Howe, T. N. (Eds.). (2001). Vitruvius: ‘Ten Books on Architec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226). 게다가 로마인들은 물을 즐길 줄 아는 이들이었습니다. “목욕과 장식용 분수에서 물의 즐거움”을 찾았지요(Rogers, D. K. (2018). Water culture in Roman society. Brill Research Perspectives in Ancient History, 1(1), 1-118. p.83).
(이미지: Velhagen & Klafing, Plan of Imperial Rome; GeoCities; www.romanaqueducts.info
Credits: Graphics reporting by Tom Kington. Graphic by Doug Stevens. Programming by
Anthony Pesce)
수로를 통해 물을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게 되면서 로마는 크게 성장하고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Wilson, A. (2008). Hydraulic Engineering and Water Supply in Engineering and Technology in the Classical World, in Oleson, J. P. (Ed.). (2008). The Oxford Handbook of Engineering and Technology in the Classical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 약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대 로마에는 11개의 수로가 건설되었습니다(Van Deman, E. B. (1934). The Building of the Roman Aqueducts. Carnegie Institution of Washington.).
가장 먼저 건설된 수로는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기원전 340년-기원전 273년)가 기원전 312년에 세운 ‘아쿠아 아피아(Aqua Appia)’입니다. 공화주의 시대에는 '안이오 베투스'(Anio Vetus, 기원전 272년-기원전 269년), '아쿠아 마르치아'(Aqua Marcia, 기원전 144년-기원전 140년) 및 아쿠아 테푸라(기원전 126년-기원전 125년), 세 개의 수로가 추가로 건설되었습니다(Bruun, C. (2013). Water Supply, Drainage and Watermill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Ancient Rome in Blake, B. J. (2001). Case. Cambridge University Press.).
그러다 수로 건설이 주춤하는 시기가 옵니다. 기원전 1세기입니다. 이 시기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력한 장군들이 나타나 권력을 잡았던 때입니다.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 ‘삼두정치(三頭政治)’의 시대라고 하기도 합니다. 노예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폼페이우스는 평민파 카이사르와 부호 크라수스와 손을 잡아 원로원에 대항하여 정치상 서로 이해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밀약하고 로마를 분할해 다스렸습니다. 그들은 공화 정치가 아닌 독재 정치를 시행합니다. 얼마 후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켈트족을 무찌르고 그 지역을 정복하며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이에 반발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결탁하여 카이사르를 쓰러뜨리려고 했고요. 이 같은 정치적 혼란의 시기 동안 대부분의 수로는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다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년-기원후 14년)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혼란의 시기가 종식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로마의 평화시대를 이끈 아우구스투스는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로서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정권을 확보했습니다. 수로도 새롭게 건설되기 시작합니다(Forbes, R.J. (1956). Hydraulic Engineering and Sanitation in a History of Technology, Vol. 2. in Singer, C. J. (1954). A History of Technology, vol. 1. Oxford University Press. p.670).
제정시대 초기, 마르쿠스 아그리파(Marcus Agrippa)의 감독 아래' 아쿠아 율리아(Aqua Julia, 기원전 33년)',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 기원전 19년)' 및 '아쿠아 알시에티나(Aqua Alsietina, 기원전 2년)', 세 개의 수로가 건설됩니다. 프론티누스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또한 “그동안 망가져버린 아쿠아 아피아, 안이오 베투스, 아쿠아 마르치아를 재건하고” “도시에 다수의 장식용 분수를 공급”했습니다(Frontinus. (1899). The Two Books on the Water Supply of the City of Rome of Sextus Julius Frontinus, translated by Clemens Herschel. Boston, Massachusetts: Dana Estes. p.13).
프론티누스는 수원에 따른 물의 특징에 관해서도 기술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수로 가운데 아쿠아 알시에티나의 물은 샘이 아니라 호수에서 왔으며, “건강에 해롭다”고 적었는데요. 그래서 아쿠아 알시에티나에서 온 물은 음용하지 않고(사실 로마인들은 생수를 잘 마시지 않았습니다.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주로 정원이나 모의 해상 전투인 나우마키아를 시행하기 위해 물을 대는 데에 사용했다고 합니다(Ibid. p.15).
기원후 52년, 황제 클라우디우스(기원전 10년-기원후 54년)는 이전 황제 칼리구라(AD 12년 ~ 41년)가 시작한 '안이오 노부스(Anio Novus)'와 '아쿠아 클라우디아(Aqua Claudia)를 완공합니다. 안이오 노부스의 물의 경우, 안이오 베투스(Anio Vetus)와 마찬가지로 안이오 강에서 공급되었습니다. 안이오 노부스 물은 침전조 탱크가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우가 많을 때마다 탁한 상태로 로마에 도달”했습니다.(Ibid. p.19) 반면, 아쿠아 클라우디아의 물은 샘물인데, 프론티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매우 맑았다고 합니다.
'아쿠아 트라이아나(Aqua Traiana)'는 트라야누스(기원후 53년-117년)의 통치 시기인 기원후 109년에 시작됩니다. 고대 로마의 11개 수로 중 마지막인 '아쿠아 알렉산드리나(Aqua Alexandrina)'는 기원후 226년에 건설되었습니다.
송수로 시스템이 점차적으로 확대되며 로마 곳곳으로 물이 공급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만 사실 고대 로마의 평범한 시민들 모두가 혜택을 받았는지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물과 저수지가 주요 수원이었습니다(Wilson, Op. cit.).
확실히 로마인들은 우물도 잘 팠던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로마 요새였던 독일 튀링겐주에 속한 도시 잘부르크-에베르스도르프(Saalburg-Ebersdorf)에서는 99개의 우물이 발견되었으니까요(Hodge, A. T. (1992). Roman Aqueducts & Water Supply. London: Bristol Classical Press. p.57). 지금의 북이탈리아·프랑스·벨기에 등을 포함하는 고대 켈트 사람들의 땅 갈리아(Gaul) 지역에서는 로마인들이 점령했을 당시에 판 것으로 보이는, 깊이가 80m에 달하는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Wilson, Op. cit. p.286). 로마의 단독 혹은 집합주택 건물에는 보통 우물이나 저수지가 있었고, 공공 우물 또한 도시 곳곳에 있었습니다(Hodge, Op. cit. p.57).
한편, 물이 생활에서 필수인 것은 사실이나 음료로서는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고대세계에서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대신 알코올음료를 많이 섭취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Vallee, B. L. (1998). Alcohol in the Western World. Scientific American, 278(6), pp.80-85.). “맥주와 와인은 병원균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입니다(Ibid. p.81). 와인의 경우, 마시기 전에 항상 물로 희석하여 농도를 옅게 만들기는 했지만요. 그런 반면, 고대 로마인 상당수가 정기적으로 알코올음료를 구입할 경제적 여유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감찰관 카토(Cato)가 군무 중이었을 때 “보통 물을 마셨다”며, 기력이 없을 경우에만 와인을 소량으로 섭취했다고 전합니다(Plutarch. (1906). Plutarch's Lives, translated by W. R. Frazer. London: Swan Sonnenschein. p.37).
물 없는 삶.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처럼 로마의 수력공학은 로마를 키운 힘이며 당대인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과하게 오해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Deming, 2000). 오늘날 일부에서는 현대 수력공학과 위생 기술 분야의 성과와 로마의 시스템을 동등시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지나친 평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인들의 업적이 어떻든 간에, 건강과 위생의 현대 기준으로 보자면 상당히 미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여기의 삶과 거기의 삶이 같을 수 없을 거예요. 고대 로마의 기술력이 대단했지만 그때의 삶은 현대와 매우 달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수로는 의심의 여지없이 로마에서 일상적인 가정용 물 공급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역할은 로마인들의 "목욕 열정"을 불(물)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목욕탕과 수영장은 다릅니다만 목욕탕에 온 어린 아이들을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담긴 물에서 놀고 싶은 마음이요. 따뜻하고 차가운 물이 있으면 벤치 하나가 더 들어와도 들어옵니다. 거기서 좀 더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이요. 찜질방, 스파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흔히 변이와 분화의 운동이 현대화라고들 합니다. 목욕탕과 수영장은 다르지만 다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받은 물이 더 깊고 많아지면 다이빙풀이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드디어 로마의 욕장과 분수들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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