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절을 당했을 때 개강 걱정을 가장 많이 했지만 수습할 일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복이 많은 n잡러의 특성상 대학 강의 외에도 외부 강의, 외주, 세미나, 원고 마감 등으로 하반기 일정이 꽉 차 있었다. 활동적인 성격이라 1년 일정을 적는 다이어리의 칸이 비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와 같이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는 많은 일정을 취소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막 시작한 세미나도 분위기 좋을 때 진행했어야 하는데 나 때문에 흐름이 끊기게 되었다. 좋은 제안을 받아 외부 학회에 여행 겸 가는 것도 기대되었고, 좋아하는 연극 행사에도 초대받은 일이 잔뜩이었는데 아쉬웠다. 취미 생활도 활발하게 하는 편이어서 예매해 놓은 연극 티켓들과 거의 1년 전에 예매했던 콘서트 티켓을 취소할 때 슬프기도 했다. 다른 부위도 아니고 다리 골절이라 이동이 불가능하니 눈물을 머금고 모든 오프라인 일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이 끝난 직후에는 하반신 마취를 해서 열두 시간 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 안정을 취해야 했다. 드디어 고개를 들 수 있게 되고 물과 음식 섭취가 가능해진 뒤에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두 군데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고 이미 수강 신청까지 다 끝난 상황이라 개강 직전에 교수자가 교체되는 것이 얼마나 민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휴대폰을 사용할 정신이 들자마자 각 대학 담당자 선생님들에게 지금 상황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연락을 드렸다.감사하게도 모두 놀라면서 나의 건강 걱정부터 했고, 개강 직전임에도 대체 인력을 빠르게 구해 주었다.
5년간의 강의 경력 중에서 개인 사정으로 강의를 못 하게 되는 것은 처음이라 많이 속상했다. 강의가 적성에 맞고,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가능하다면 온라인으로라도 강행하고 싶었지만 내 욕심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이번 학기에는 강의를 모두 쉬기로 했다. 골절은 대부분 회복 기간이 길다 보니 휴직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출근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힘들어했기에 가능하면 쉬는 쪽으로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 외에도 오프라인 일정들을 하나하나 취소했다. 다행히 외부 강의는 남은 두 번의 강의를 온라인으로 전환할 수 있어서 줌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모두 상황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어서 고마웠다. 오프라인 일정들을 모두 쳐 내고 나니 줌 강의와 원고 마감, 재택근무로 일했던 교정 교열 일만 남게 되었다. 그때부터 수술한 다리를 받침대에 올려놓은 거상 자세로 병실에서 재택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일하는 게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도구들 덕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여유 시간에는 이북 리더기로 소설과 에세이도 많이 읽었다.
병실에서도 나는 맥시멀리스트가 되었는데 많은 지분을 차지한 것이 작업 도구였다. 노트북과 휴대용 키보드와 마우스부터 시작해서 이북 리더기, 최소한의 종이책, 다이어리, 노트, 필통과 필기구들, 메모지, 드로잉북, 간이 테이블 등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작업 도구이자 짐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노트북이 필수였는데 만약 개인 노트북이 없다면 대여도 가능하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도 노트북을 대여해 준다는 광고 스티커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가장 많이 사용했던 작업 도구들인 노트북, 키보드, 마우스, 간이 테이블.
작업 도구 중 간이 테이블도 활용도가 높았다. 텀블벅에서 펀딩한 것인데, 나무로 된 테이블에 깔개가 있고 아랫부분은 부드러운 천으로 되어 있어서 소파나 침대에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사용하기 좋았다. 집에서도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간식을 먹을 때 유용하게 사용했었다. 병원에 가져오기에는 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하루라도 없으면 불편했을 것이다.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에는 음식 테이블로 사용했고, 자세를 바꾸기 어려울 때에는 간이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무릎에 키보드를 놓은 뒤 작업을 했다. 누워서 영상을볼 때에도 노트북을 바로 무릎 위에 놓으면 발열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간이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보니 좋았다. 이후에 자세를 자유롭게 바꾸면서 병원 침대의 테이블을 작업대로 사용할 때는 깁스한 다리를 올려놓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꿀템이었다!
사실 병원과 병실을 여러 번 옮기면서 나만큼 짐이 많은 사람을 거의 못 볼 정도로 병실에서 살림을 차리기는 했지만 덕분에 입원 생활이 지루하지 않았다. 병실이 작업 공간의 역할도 톡톡히 하면서 이 안에서 많은 일을 했다. 브런치 작가에 응모하고, 브런치 공간에 여러 글을 올리면서 에세이를 쓰는 것 역시 중요한 병실 재택근무 작업 중의 하나였다. 평소에 다이어리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기에 입원할 때도 다이어리를 가져왔는데, 병원에서 했던 재택근무 목록들을 정리하고 체크리스트를 쓰니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입원을 하면 매일매일이 비슷해 보이고 지루해서 자칫 무의미한 시간이 될 수도 있는데,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 물론 수술 직후나 아플 때에는 무조건 절대 안정을 취하고 많이 자고 많이 쉬어야 한다. 병실에서의 재택근무는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 병실 생활이 지루해질 때 시도하는 것이 좋다. - 그래서 작은 탁상시계를 침대 난간에 걸쳐 놓고 작은 달력도 수액 거치대에 붙여 놓으면서 시간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일하는 데 환경 탓을 하는 것이 초보 같지만 나는 집에서 공부도, 일도 집중이 잘 안 되어서 작업 공간을 따로 두는 편이다. 그러나 병실은 잠을 자는 침대가 바로 작업 공간이기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깁스를 하면 통잠을 자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수면의 질이 높지 않아서 낮에 피곤하기도 하고, 병실의 공기가 답답하기도 해서 맑은 정신으로 작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를 많이 쓰는 일보다는 비교적 가볍게 할 수 있거나, 스킬이 필요해서 많이 익숙해진 일들 위주로 했다.
또한 욕심을 내서 많은 일을 하기보다는 하루에 한 가지 정도의 목표만 세우고 남는 시간에는 그동안 못 읽었던 소설을 많이 읽었다. 소설 전공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장 일이나 연구에 필요한 책들만 급하게 읽다 보니 소설들을 따라 읽는 게 쉽지 않다. 이번 기회에 읽기 목록들을 많이 쌓아 두기로 했다. 산출을 하려면 투입도 중요한데 쥐어짜 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북 리더기로 틈날 때마다 소설들을 읽어 치웠다. 시간도 잘 가고 뿌듯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는 게 상투적인 말일 수 있어도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