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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Oct 05. 2024

슬기로운 골절 생활 (5)

우여곡절 끝에 수술 성공



'그렇게 조심성 많던 내가 하루아침에 골절인이 됨'


몽골에서 골절 사고를 당한 것을 한 줄 요약하면 이렇다. (유행하는 웹소설 제목 같나?)



한국 땅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한국 병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한 뒤 마찬가지로 친절한 공항 직원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이동했다. 원래 담당하는 직원이 다른 일로 오지 못해 대신해 준 분이었는데, 끝까지 나를 책임져 준 고마운 분이었다. 몽골과 한국 항공 승무원들과 직원들 모두 너무나도 친절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이동하는 사이에도 못 참고 질문을 했다.


"저처럼 해외에서 다쳐서 온 사례가 많나요? 저는 심하게 다친 편이죠?"

"예, 뭐 흔한 상황은 아니지만...... (1차 절망) 그래도 더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말 타다가 떨어져서 척추를 다친 사람이 있었는데, 좌석을 일곱 개 예매해서 누워서 와야 했어요."

"헉! (말을 잇지 못하는)"


해외에서 다치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정말 상상 이상으로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도 국내든 해외든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여행에서 다친다는 생각이나 가정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여행을 가면 더더욱 조심스럽게 다녀야 할 것 같다.


공항에는 미리 연락을 받고 늦은 시간에도 배우자와 제부가 나와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랐을 텐데 한달음에 달려와 주고, 내가 놀랐을 것을 염려해서 오히려 밝은 모습으로 날 맞이해 준 게 고마웠다. 심지어 휠체어 타고 출국장으로 나오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순간 연예인이 된 줄 알았다. (역시 센스 있는) 친절한 직원이 출국장뿐만 아니라 입구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다.


이제 병원으로 이동하는 일만이 남았는데, 나는 친정 근처에 있는 대학 병원으로 가기를 원했다. 진료를 받거나 수술을 받은 기록이 있고, 친정과도 가까워서 가족들이 오기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병원으로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119를 먼저 불렀다. 하지만 빠르게 온 구급대원들은 내가 원하는 병원으로는 갈 수 없고, 공항이 있는 인천 내 가까운 병원으로만 이송이 가능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119로 이동하는 것은 포기했다. 사인만 한 뒤에 구급대원들은 돌아갔다. 드디어 누워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약간 슬펐지만 빨리 대책을 찾아야 했다.


고민하다가 콜밴을 타고 대학 병원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던 콜밴을 잡았다. 콜밴의 좌석이 높아서 올라가는 데 애먹기는 했지만 타고 나니 좌석을 눕힐 수 있어 편했다. 드디어 '곧' 입원과 수술을 할 수 있는 걸까? 아빠와 제부는 짐을 싣고 따로 제부의 차로 가기로 하고, 나와 배우자만 콜밴을 탔다. 전화로만 내 사고 소식을 알렸기 때문에 얼굴을 본 뒤 쌓인 말들이 많아 한동안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이동하는 동안 기분이 좋아졌다. 창밖을 구경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곧'은 금방 오지 않았다. 대학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접수를 했는데, 한참을 기다린 뒤 들어온 소식은 골절 수술을 할 수 있는 전공의가 없다는 거였다! 그제야 한국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스로만 보았으나 피부에는 와닿지 않았던 의료 파업의 여파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뺑뺑이'를 도는 것은 아니겠지? 이미 골절 사고를 당한 지 하루가 훨씬 넘었기 때문에 지체된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자정이 지났기 때문에 날짜로는 이미 이틀이 지난 상황이었다.


고민할 시간도 없어서 바로 대책을 생각해야 했다. 근처에 있는 정형외과 전문 병원을 갈까 했지만 응급실이 없어 새벽 시간에는 운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전문 병원을 알아보고 가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거기에서도 거절당할 것이 두려웠다. 다행히 대학 병원 측에서는 협력 병원을 연결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연결해 준 협력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협력 병원에서 구급차를 보내 주어서 골절 사고를 당한 뒤에 처음으로 온전히 누워서 갈 수 있었다. 들것에 눕자 긴장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긴 시간 동안 여러 교통수단으로 이동한 탓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대로 누워 잠들고 싶었지만 사이렌 소리에 저절로 각성 상태가 되었다.


협력 병원에 도착한 뒤에는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새벽에 도착했지만 24시간 열려 있는 응급실이 있는 병원이다 보니 응급실에 도착해서 접수를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입원 수속을 했다. 내 상처를 보는 사람마다 놀라서 무척 심란했다. 올해 초에 결혼을 했지만 아직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아서 아빠가 보호자로 서명했다. 나중에 병원에서 만난 다른 환자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갔을 때 마찬가지로 골절 때문에 응급실에 온 젊은 환자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환자는 여기저기 전화를 했지만 보호자를 찾지 못해 결국 수술을 못 받고 집에 갔다고 했다. 골절의 고통을 알아서 그 상태로 수술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니 무척 안타까웠다. 그분이 타인이긴 하지만 그때 자신이라도 보호자 역할을 했어야 했나, 하고 후회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보호자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병원비 때문에 법적 보호자가 우선이기는 하지만, 임시 보호자라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


응급실에서는 나보다 먼저 와 있었던 환자 한 명이 취한 상태로 발등이 골절되었는데, 수술을 안 받고 집에 가겠다고 난리를 쳐서 간호사 선생님이 애 먹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새벽 시간이었지만 결코 조용하지만은 않은 응급실을 떠나 병실에 들어갔다. 나는 몽골에서 가족들의 돌봄을 받았던 기억이 매우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보호자가 상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공동 간병인실에 입원하기로 했다. - 이는 결과적으로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 새벽에 입원한 뒤, 바로 그날 수술하기로 했다.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응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는지 원래는 오후에 예정되었던 수술이 오전으로 앞당겨졌다. 조금이라도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어 좋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가족들에게 브이를 하고 있는 모습.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대한 씩씩한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하반신 마취를 해서 살짝 잠을 잘 수 있는 약이 투여되기는 했지만 수술 과정에서 나오는 대화들이 약간씩 들리기는 했다. 가물가물한 정신이라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단 두 마디는 선명하게 기억난다.


"끔찍하군."

"다리를 새로 만드셨네요."


실력 있는 의사 선생님 덕분에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리도 새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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