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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27. 2024

슬기로운 골절 생활 (4)

고난의 여정 (3)




심란한 마음으로 뒤척이다가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나니 새벽이 되었다. 공항이 있는 울란바토르까지 몇 시간을 차로 이동해야 했기에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서둘러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했다. 다시 힘겹게 떠메진 채 차를 타고 덜컹거리는 길을 이동했다. 좁은 차 안에서 다리를 뻗고 있어야 하는 내가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이동하는 과정도 고문이었을 것이다. 골절인이 된다는 건 주변의 사람들에게 지속해서 짐을 지우는 일인 것 같다.


공항에 도착한 뒤에는 휠체어를 빌릴 수 있어 기뻤다. 하지만 거상 휠체어가 아닌 일반 휠체어밖에 없다는 말에 잠시 좌절하기도 했다. 다리가 골절되었을 경우, 두 다리를 아래로만 내려야 하는 일반 휠체어가 아니라 발판을 위로 올려서 다리를 앞으로 뻗을 수 있는 거상 휠체어가 편하다.


나도 거상 휠체어와 일반 휠체어의 차이는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https://blog.naver.com/lifehelperkorea/223507887375




결국 수동으로 거상 휠체어처럼 만들기 위해 다리를 앞으로 뻗은 뒤, 다리 아래에 상자를 받쳐서 이동해야 했다. 그래도 공항 안은 장애인 화장실이 넓어서 편했다. 휠체어를 타는 순간부터 가장 많이 신경 쓰이는 것이 화장실인데, 공공장소에만이라도 장애인 화장실이 넓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잠금장치도 없는데 볼일을 보는 도중에 한 아저씨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서 화장실 안에 같이 있던 가족들까지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제발 문이 닫혀 있으면 노크부터 해 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공항에서 몇 시간 대기하면서 햄버거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약발이 떨어지면 아프기는 했지만 전날보다는 약간 진정된 상태라 음식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다리가 골절되었다는 것을 잊고 가족들과 수다를 떨었다. 현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던, 잠깐이라도 숨통을 틔웠던 순간들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대기 시간을 보내고 휠체어를 탄 채 아빠와 탑승 수속을 했다. 몽골 항공의 승무원들은 무척이나 친절해서 휠체어를 보자마자 적극적으로 응대해 주었다. 하지만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일반석인데 다리를 뻗은 채로 비행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염치없지만 이와 같은 상황을 승무원에게 전달했다. 한국어를 잘했던 승무원은 우리의 상황을 자세히 듣자 난감해했지만 곧바로 다른 승무원들과 이야기하고 전화를 여러 번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아빠와 나는 할 만큼 했으니, 안 되면 아빠의 무릎에 내 다리를 올려놓고라도 가 보자고 얘기를 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천사가 만들어 준 기적을 맛보게 된다.


비즈니스석을 예매했던 몽골인분이 나를 위해 좌석을 양보해 준다는 것이다!


그 소식은 구원이자 동아줄과도 같았다. 비록 한국과 몽골의 비행시간이 3시간 30분 정도로 길지는 않지만, 그 시간 동안 다리를 뻗지 못한다면 나중에 어떤 일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어 무서웠기 때문이다.


승무원들도 기뻐하면서 나를 비즈니스석까지 데려다주었다. 공항에서 탔던 휠체어와 달리 기내에서는 좁은 휠체어를 써야 해서 난감했지만 승무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옮겨 탔고, 좌석까지 안전하게 안내받을 수 있었다. 나는 바로 좌석으로 가는 바람에 그분의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아빠는 그분의 옆에 앉아서 감사 표시도 하고 대화도 했다고 한다. 사례를 하고 싶어 몇 번이나 연락처를 요청했지만 그분은 끝내 알려 주지 않았다. 대가 없는 호의를 받다니, 세상에 완벽한 불행은 없나 보다. 그분에게 더 좋은 일, 더 기적 같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몽골 천사 덕분에 난생처음 비즈니스석을 타게 되었다. 탑승 사진을 남겼지만, 이후로도 내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아무래도 아픈 상태이다 보니 전반적으로 불쌍한 몰골이기도 하고-



양보받은 몽골 항공 비즈니스석에서 다리를 뻗고 있는 모습. 아빠께서 우주선 같다고 표현해 주시기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안락하고 낭만적인 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긴장이 풀리기도 해 어둠 속에 있게 되자 눈물이 흘렀다. 사고가 난 뒤로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서럽고 억울하고 슬프고 우울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들로 버무려진 상황에서도 할 건 해야겠기에 기내식도 야무지게 먹었다.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한국에 도착했다. 곧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곧'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처럼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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