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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6시간전

슬기로운 골절 생활 (3)

고난의 여정 (2)



하지만 한국에서의 일은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작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바로 119를 불러서 들것에 실려 가 병원으로 갈 수 있었지만, 내가 사고를 당한 곳은 몽골인 데다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도 멀리 떨어진 시골이었다는 것이다. 트레킹을 했던 협곡은 평지였지만 길이 좁아서 119가 들어오지 못하고, 헬기 같은 고급 구조 수단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해외여행을 가서 다친다는 게 생각보다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한국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걸을 수 있을지 잠시 서서 발을 디뎌 보았는데 디디자마자 주저앉았다. - 이때 잠깐 디뎠던 게 큰 상처로 번지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별수 없었다. - 그야말로 누가 땅에서 나를 잡아당긴 것처럼 스르륵, 무너졌다. 발을 땅에 딛지 않고 가려면 누군가가 업고 가거나 양옆에서 부축해 주는 수밖에 없는데, 단거리도 아니고 먼길을 그렇게 갈 수는 없었다. 난감했다. 절망적이었다. 어떻게든 이 협곡에서 빠져나가야 그다음 단계가 있을 터였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승마 체험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저 말 타고 갈게요. 말 불러 주세요......."


그 말을 들은 현지 가이드가 바로 조치를 취한 덕분에 말을 타고 갈 수 있었다. 마부에게 부탁해 최대한 천천히 가 달라고 하고, 다리가 움직이면 안 되기 때문에 아빠가 옆에서 내 다리를 붙잡고 천천히 걸어갔다. - 몽골에서 한국까지 다리를 최대한 움직이지 않도록 아빠와 가이드님이 말에서, 차에서 계속 붙잡고 다닌 걸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 하늘이 노래지고 눈앞이 깜깜한 와중에도 말에 탄 채 바라보는 풍경들이 아름다워서 서글퍼졌다.


일 분이 한 시간과도 같은 협곡 길을 착한 말 덕분에 빠져나왔다. 그다음 단계도 만만치 않았다. 말에서 혼자 내려올 수 없어 낯선 몽골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여러 명이 달려들어서 말에서 나를 데려 주고 다시 떠메서 차에 실어 주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타인들의 호의에 감격했다. 차 안에서도 다리를 뻗고 있어야 해서 누군가는 내 다리를 계속 붙잡았다.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마다 충격이 가해지자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한국 병원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모른다.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 낙타 인형과 함께 행복하게 찍었던 사진. 처음에는 이 사진도 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괜찮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어서, 한참을 달려 도착한 은 근처에 있던 시골 병원이었다. 급한 대로 엑스레이를 찍고 통깁스를 하고 진통제를 처방 받았는데 이때가 정말 고통스러웠다. 침상에 올라가는 것도 무섭고 아파서 주저주저하며 겨우 올라갔다. 엑스레이 대에서 스스로 다리를 움직여 자세를 바꿔야 했는데, 뼈가 부러진 채로 움직이려니 지옥이었다. 복숭아뼈 쪽은 이미 퉁퉁 붓고 피멍이 들어 있었다. 내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내 발 같지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엑스레이를 겨우 찍고, 통깁스를 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남동생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재갈이라도 있으면 물려 줬으면 좋겠다고.


신체적인 고통만큼 괴로웠던 건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엑스레이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피가 말랐다. 감당 못 할 선고를 받을까 봐 무서웠다. 오래 기다렸다가 만난 푸근한 인상의 몽골 의사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가이드의 통역을 기다리는 동안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의사의 긴 말을 요약하자면 뼈가 많이 부러졌고, 수술을 해야 하며, 몽골이 아닌 한국에서 하는 것을 권한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바빠졌다. 비행기 표를 급하게 변경해야 하고, 당일 표는 없어 하룻밤 묵어 갈 숙소를 구해야 했다. 현지 가이드의 도움으로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비행기 표는 가족들 모두 변경이 어려워  나와 아빠만 먼저 다음 날 한국에 가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다리를 뻗고 가려면 비즈니스석을 타야 했는데 남은 자리가 없어 일단 일반석으로 끊었다. 변경 수수료도 꽤 컸는데 여행자 보험에서는 보상을 안 해 줘서 고스란히 개인 부담이라는 게 억울했다. (그래도 현지 통원 치료비와 한국 병원에서의 수술비는 보상 받았으니, 여행자 보험은 무조건 고급형으로 드는 것을 권한다.)


시골 병원이다 보니 통깁스를 하기 위한 재료도 근처 약국에서 직접 사 와야 해서 깁스를 하는 과정도 오래 걸렸다. 진료를 받고 호텔로 이동했는데, 여기에서도 난관이 있었다. 묵어야 할 숙소는 3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한 번 절망적이었지만 역시나 혼자서는 무력했다.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와 가이드님이 양옆에서 나를 떠메고 3층까지 계단을 올라갔다. 다들 너무 힘들어해서 이때만큼은 내가 마른 편이 아니라는 점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숙소 침대에 누우니 진이 다 빠졌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이 있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일단 바지가 불편하기 때문에 여동생이 내 바지를 가위로 자르고 자신의 치마를 입혀 주었다. 거상을 해야 해서 깁스한 다리 밑에 이불 등을 깔고 한 자세로만 있었다. 화장실을 혼자 갈 수 없기 때문에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일회용 수건 여러 개를 깔고 처리했다. 일회용 수건은 몽골에서 샤워할 때 유용했는데, 간이 화장실로도 유용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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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덤덤하게 말하지만 치부를 드러낸 채 엄마와 여동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고맙고 속상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무조건적인 돌봄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다시 아기로 돌아간 듯한, 또는 인간의 존엄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은 착잡했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닥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겪기 전까지는 이와 같은 감정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려울 것 같다. 화장실을 최대한 안 가고 싶어서 음식도 진통제를 먹기 위한 수단으로서 조금만 먹고 물도 적게 마셨다. 가족들 모두 충격을 받은 터라 맛깔스러운 한식 도시락을 앞에 두고도 거의 남길 수밖에 없었다. 자세도 불편하고 진통제 효과가 떨어지면 귀신같이 통증이 찾아와 잠이 안 왔지만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몽골 가족 여행은 4일 만에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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