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단원을 뽑는 오디션에서도 졸린은 모든 심사위원을 잠재웠다. 졸린의 얼굴을 본 심사위원들의 눈이 풀어졌다.
그들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극단에 들어오고 싶은…… 이유를 말해 보게.”
“네, 네, 보시다, 다시피 제, 제 눈이 작은데, 제, 제가 유일하게 누, 눈을 크게 떠 본 게 <햄릿>을 보, 볼 때였습니다.”
졸린은 긴장한 나머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그때 심사위원들이 졸린의 눈을 본 것이 화근이었다. 심사위원들에게 졸음이 쏟아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해, 햄릿의 대사 주, 중에 주, 죽느냐, 사느냐 그, 그것이 무, 문제로다.”
“그래. 그게 문제야. 지금 졸려…… 죽겠다고. 왜…… 이러지?”
심사위원들이 한두 명씩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그들은 곧 팔베개를 하고 잠들어 버렸다. 졸린이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졸린은 뒷번호 대기자들에게 뭇매를 맞을 뻔했다.
“야, 너 때문에 오디션도 못 봤잖아, 뒤질래?”
그들의 주먹이 졸린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들도 모두 잠들어 버렸다.
세 시간 뒤 기지개를 켠 심사위원들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 개운해. 요 몇 년 만에 편안한 잠을 자 본 것 같아.”
그들은 졸린을 명예 단원으로 뽑았다. 단원으로서 졸린이 처음 한 일도 수면 보조사 일이었다. 평소에는 고개를 숙인 채 청소하거나 마스크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공연 포스터를 붙였다. 그러다 공연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단원들이 불면증에 시달릴 때 부드러운 눈 맞춤을 해 주었다. 눈을 똑바로 본 뒤 하나, 둘, 셋, 넷, 다섯, 딱! 그들은 아기 같은 얼굴로 잠들었다.
졸린도 다른 단원들처럼 대사를 한 번이라도 읊어 보고 싶었다. 극단에 들어온 지 한 달째 되는 날 졸린은 대걸레 자루를 마이크처럼 짚고 외쳤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 무렵 극단에서는 <햄릿>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졸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웃는 이들은 졸린의 얼굴을 보게 될까 봐 고개를 옆으로 빠르게 돌렸다. 졸린과 함께 극단에 들어온 단원들이었다.
그들은 졸린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목이 돌아간 인형처럼 고개를 꺾었다. 그 뒤에 삐뚤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관객들 다 재워서 장사 망칠 일 있냐?”
졸린도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이게 내 꿈이었어, 예, 예전부터.”
“얌마, 너한테 꿈은 깨라고 있는 거야! 인간 수면제 주제에 배우는 무슨…….”
“맞아, 이 자식 맨날 졸고 있는 것 같잖아? 지금도 자고 있네, 뭘!”
졸린은 그게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눈꺼풀을 위로 밀어 올리려 했다. 돌덩이처럼 굳은 눈꺼풀은 움직이지 않았다.
졸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단원들이 졸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졸린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단장이 보았다. 졸린의 주변에 쓰러져서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단원들의 모습을 보며 단장이 박수를 쳤다.
“바로 이거야! 관객들을 모두 쓰러뜨려 보자고!”
극단의 창단 10주년 특별 공연이 바뀌었다. 실험작을 올리고 싶었던 단장의 욕심 때문이었다. 졸린이 단독 주연으로 출연하는 일인극이었다. 이게 무슨 서커스도 아니고, 로 시작하는 불만을 터뜨리는 단원에게는 졸린이 가차 없이 시선 공격을 했다. 반대자들을 조용히 잠재우고 난 뒤 단장을 비롯한 남은 단원들은 공연을 준비했다. 대본도 없었다.
단장이 졸린에게 말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 다 해 봐. 다들 자느라 정신없어서 들을 사람은 없을 테니.”
“저에게도 관객이 필요합니다.”
“네가 원하는 일을 하지 말고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해.”
졸린은 포스터를 붙이는 일에서 처음으로 빠졌다. 졸린을 놀렸던 단원들이 포스터를 붙이러 다녔다. 그들은 졸린이 없는 곳에서 그의 욕을 하곤 했다.
졸린이 단독으로 출연한 공연의 포스터는 나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흰색 가면을 쓴 졸린이 포스터에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공연의 제목은 <서울의 잠 못 드는 밤>이었다.
극단 ‘연사’의 창단 10주년 특별 공연
<서울의 잠 못 드는 밤> - 자느냐, 안 자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권장 수면량을 어기는 현대인을 위한 모놀로그 연극
팍팍한 일상을 적셔 주는 한 줄기의 잠,
한바탕 개꿈 같은 일인극!
‘두 시간의 깊은 수면은 두 봉지의 보약보다 낫다’
잠을 자지 못해 졸린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연극입니다. 퇴근하자마자 데이트 때 억지로 공연을 보느라 졸음을 참으셨던 분들, 걱정 마십시오! 편안한 공연이 여러분 곁을 찾아갑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 가족, 직장 상사와 단체 관람을 해도 무방합니다. 공연이 끝나면 ‘함께 잠을 잔 사이’로서 모두가 더욱 친밀해질 것입니다. 좌석에는 방석과 무릎담요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졸음을 참는 데 자신 있는 분들의 도전도 기다립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잠들지 않았을 경우에는 티켓값을 전액 환불해 드립니다.
출연진 : 미스터 졸린
극단 ‘연사’에서 수면 보조사로 활동 중. 천하장사도 못 드는 눈꺼풀의 위력을 세 살 때부터 알았던 잠의 마법사. 이번 공연은 그의 데뷔작으로서 그가 가진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최초로 눈을 감고 보는 연극’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연극을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남들 웃을 때 웃으려고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자지 않기로 유명한 올빼미족들, 야근에 이력이 난 직장인들이 앞다투어 예매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낮잠 카페보다 이용료는 비쌌지만 문화생활을 했다는 취향도 살 수 있었다. 열흘로 예정된 공연의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나도 그 공연을 보러 갔었다. 공연 첫날에 하는 프리뷰 공연이었다. 여덟 시 정각이 되자 무대의 막이 올랐다. 무대 가운데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비바람에도 에이지 않고 가지를 뻗을 것 같은 나무였다. 주위는 어두웠다. 조명은 오롯이 나무만 비추고 있었다.
관객들은 잠들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눈꺼풀 위에 테이프를 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졸릴 때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물병도 끌어안고 있었다. 음식물은 반입 금지였지만 몰래 졸음 방지용 사탕이나 껌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연이 시작된 지 십오 분 만에 드디어 졸린이 등장했다. 그는 관객들을 등진 채 게처럼 옆으로 기었다. 옆걸음으로 나무에까지 도착했다. 느린 걸음이었다. 일 분에 한 발자국씩 걷는 것 같았다. 곧 졸린은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관객들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졸린은 서두르지 않고 나무 꼭대기까지 올랐다. 그때까지 대사 한마디 없었다.
꼭대기에 올라간 졸린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졸린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아, 하고 외쳤다.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꺼풀 위에 붙였던 테이프가 튀어 나갔다. 맨 앞줄에 있던 관객들부터 고개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도미노처럼 둘째 줄, 셋째 줄에 있던 관객들도 무너졌다. 무너지지 않기에는 깔고 앉은 방석이 너무나 푹신했다. 허벅지 위에 놓인 무릎담요는 따뜻했다. 졸린이 나무에 올라간 의미와 졸린의 얼굴에 담긴 상징을 해석하려고 했던 기자와 평론가들도 담요에 고개를 묻었다. 졸린이 마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졸린의 대사를 한 마디도 못 들은 관객들이 많았다.
관객들이 다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졸린은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 동안 내 사생활이 진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졸린은 모든 관객이 잠든 줄 알았겠지만 그 공연에서 잠들지 않은 단 한 명의 관객이 있었다. 바로 나였다. 밝은 곳에 있다가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장막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나무 위에 있는 졸린의 얼굴도 흐릿했다. 졸린의 얼굴은 눈과 입이 뭉개진 상태로 보였다. 목이 졸린 사람의 얼굴 같았다. 이러한 증상이 야맹증이라는 것을 안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때는그저 피곤해서 일시적으로 그런 줄 알았다.
덕분에 유일한 관객으로서 졸린의 대사도 들을 수 있었다. 들리는 대로 대사를 다 받아 적었다. 그 대사를 최대한 인용해서 기사를 썼다. 이제까지 내가 썼던 기사 중에서 조회 수가 가장 높았다. 제목은 <수면 보조사에서 연극 주도자가 된 졸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