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이 떠난 회사, 이렇게 시작해도 괜찮은 걸까?
오전 열 시, 아직 집. 흐릿한 날씨와는 다르게 마음은 청명했다. 현관에 나가 허리 숙여 부츠 지퍼를 잠근 후 셔츠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나가기 전 현관 앞 거울로 가볍게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깔끔한 아침의 시작.
날은 따스했지만 마음은 흐릿했던 날, 퇴사를 했다. 갑작스러운 퇴사였다. 나를 포함한 직원들은 월급을 제때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걱정하고 점점 부풀어 오르는 일을 처리하느라 내부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너도 나도 누가 먼저 나갈까 눈치 게임하던 끝에 한껏 날이 선 대표님의 각 부서 일괄 사직서 명령이 떨어졌다.
'결국 여기도 1년을 못 채우는구나.'
씁쓸한 마음도 드는 한편, 이제 더 이상 일에도, 회사에도 매여있지 않아도 되는구나 싶어 안도감도 들었다.
안도감도 잠시. 감정은 착실히 엎치락뒤치락 영역 다툼에 열심을 다했다. 어느 날은 '그래 이깟 회사 때려치워!' 호전적인 장군 같다가도 '부업 아니 사이드 잡이라도 해둘걸. 왜 항상 준비가 안 되어있을까.' 세상 작디작은 소심한 인간으로 변모했다. 마지막 날, 정말이지 전쟁에 맨 몸으로 뛰어들 상황이 되자 호기는 어디로 가출했는지 뒤늦은 후회와 자책만이 남아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대책 없는 퇴사다.
퇴사 직전까지 아니 퇴사 이후에 회사에서는 다시 돌아오라며 손을 내밀었기에 1년을 채울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조각난 경력의 압박과 뾰족한 능력의 부재는 끝까지 '이 회사도 나쁘진 않지..?' 정신 승리를 거듭했다. 회사의 부름은 마치 낡은 동아줄 같았다. 솔직히 '이게 바로 삼고초려인가!' 싶어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바로 밀려드는 이성은 잔혹한 말을 퍼부어댔다. 약간 들떴던 마음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회사와 일에 대한 불안감이 이겼기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불안 vs. 야생으로 떨어진 불안
일, 경력, 환경 등등 한동안 열심히 얽히고설키며 싸워댄 결과
다시 돌아가지 않음을 선언했다.
영영. 다른 회사로도.
대단한 기술, 인맥... 무언가가 있어서 이직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거기에 나의 경력은 기간이 무척이나 어수선했다. 8개월, 6개월, 4개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한 사람처럼. 아르바이트에서는 환영받는 경력일지 모르겠으나 직장은 아니었다. 마치 내가 적응을 못하는 사람처럼, 한 곳에 오래 못 있는 사람처럼. 일부는 인정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부다. 그러나 채용하는 입장에선 이 기간이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줄 정도로 친절하진 않았다.
조각난 경력을 다시 이어갈 것인가,
다른 방향을 찾을 것인가.
퇴직을 앞두고 나는 한동안 두 가지 마음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랬다. 나는 정말 경력도, 뛰어난 무언가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마케터로 들어갔지만 정작 마케팅보단 처리해야 할 긴급한 다른 일들을 했다. 전문성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분야가 아닌 일을 하며 첫 시작의 상처와 싸웠다. 인정은 더뎠고 비난은 더 했다.
'그래도 좀 더 버텨보면 되지 않을까.'
'경력 단절보단 그게 낫지 않아?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나가는 게 맞을까?'
'다른 곳을 구할까? 아니 지금까지 다녀왔던 곳도 비슷했잖아.'
'또다시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한다면 내게 미래가 있을까?'
무수히 많은 질문과 갈등, 번복 속에서 결국 나는 다른 무모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어찌 됐든 '내 일'을 하자.
더 좋은 회사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고.
프리랜서 전향을 한 후 한동안은 카페로, 공유 공간을 찾아다녔다. 빠릿빠릿하게 9-6의 일정에 맞춰 출근했다. 새해를 맞은 사람이 첫 마음을 간직하며 열심히 살겠노라 다짐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대책 없이 떠나왔기에 한동안은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고, 닳어버린 정신줄도 잘 다듬어야 했다. 부지런하게 쌓는 시간이 필요했다.
제법 높은 언덕에 위치한 공유 공간은 나가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였다. 귀찮음을 이길 용기! 돈이 한참 아쉬운 프리랜서에게는 무료라는 이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에 만족 가능한 용기가 생기는 법. 아침마다 등산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오르내렸다. 노트북과 책, 점심 도시락을 등에 짊어지고 가쁜 숨을 몰아치며 일터에 도착하고 나면 송골송골 맺힌 입김으로 마스크 안쪽이 축축했다. 날은 계속 추워지고 가는 길은 멀었다. 아침마다 돌을 굴려 피라미드를 쌓으러 가는 노예가 된 것 같았을 때 다시 그곳에 오르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불안의 익숙함과 흐미하지만 존재하던 미래의 낙관이란 게으름에 발목 잡혀 시간을 과소비했다. 어느덧 얄팍해진 달력에 그저 부유하던 일상에 갑자기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뭐 했지?' 속이 울렁였다.
집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체력이 부족하단 핑계도 대지 못하게 가까운 곳을 물색했다. 다행히도 10분 정도 거리에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았다. 금전적 부담은 있지만 그래도 체력과 부지런함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았다.
사실, 회사 안에서 보는 바깥은 낙관적이었다.
대행업체에서 보낸 메일을 확인했을 때만 해도 생각은 공고했다.
그들이 보내온 말도 안 되는 작업 퀄리티에 한숨을 넘어 화를 삭이고 있을 때, 한편으론 분노가 다른 한 편으론 자신감이 생겼다.
'이 사람도 이 정도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면 나도 먹고살 수 있겠다.'
어차피 대행한 일 내가 수정하고 있는데 차라리 내가 직접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꾸물꾸물 꿈을 키웠던 것 같다.
마음과 현실이 같으면 참 좋겠지만 아이코. 현실은 더없이 차가웠다.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지냈다. 그 사이 숨만 쉬어도 돈이 사라지는 현실은 계속해서 불안의 종을 울렸다. 금방 채워질 것 같던 스킬은 배워도 배워도 모자랐고 그동안 미뤄둔 일들로 경력, 수입, 뭐 하나 제대로 나아진 게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경험은 배운다고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저 배우면 되다는 단순했던 생각이 문제였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이 나이에 무엇 하나 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음에 어느 순간 마음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불안과 자책, 안일함에 버무려져 그럭저럭 보내는 하루가 뭉텅이로 지나간 후 깨달았다.
내가 세웠던 계획 중 단 하나도 이뤄진 게 없었다.
나는 삶이라는 스케치북에 목적이 불분명한 선만 가득 그려진 종이 한 장을 얻었다.
"뭘 그리고 있던 거야 대체?"
귓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하루종일 울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