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애착에서 시작되었다

붉은 낙엽을 읽고

by 앤디


초복마저 지난 한국의 삼복 무더위에 토머스 H. 쿡의 붉은 낙엽을 읽었다. 한 여름에 ‘붉은 낙엽’을 떠올리는 일은 내게 퍽 생경한 경험이었다. (여름과 가을은 바로 맞닿아 있는 계절이지만) 여름의 더위는 낙엽과 같이 ‘떨어지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록 내버려 두지 않 때문이다. 런데도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 어느 때의 가을보다도 더 선명하게 붉은 낙엽을 본 기분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인연이 있는 것처럼, 사람과 이야기가 만나는 것에도 인연이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소중한 것에 대해 애착을 갖는 사람, 그리고 그 마음을 좋아한다. 애착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질이라고 했던 에릭의 생각을 읽은 순간, 이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읽겠구나 하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고 진짜 그렇게 됐다.


운명의 진부한 장난처럼, 언제나 나의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원하던 것들은 더 세게 부서지고 더 빠르게 흩어지곤 했다. 애착이 몰고 오는 이 슬픈 인과관계를 알게 된 이후, 내가 얻은 것은 삶에 대한 강도 높은 회의감과 회복하기 어려운 무력감뿐이었다. 메러디스가 읽은 시의 구절대로 ‘첫 번째 죽음이 있은 뒤, 또 다른 죽음은 없다’ 면 좋았겠지만 내 밖의 소중한 것이 나를 떠나자, 내 안의 소중한 것도 나를 떠나버렸다.


이런 점에서 에릭의 이야기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으로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고,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친근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에릭의 정서적 균열과 혼란, 환상, 불안, 무너짐, 슬픔, 애착의 모양은 내 것기도 했고, 그 누구의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 불가사의한 아버지와 잘 알 수 없었던 형 사이에서 안온한 가족의 행복을 누린 적 없던 에릭은 두 번째 가족(아내와 아들)을 통해 몰랐던 삶의 깊이를 얻고자 노력한다. 첫 번째 가족에게서 받았던 트라우마로부터 도망쳐 어떻게든 두 번째 가족에게 그 불행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애썼던 의 노력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그도 모르게) 그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목표물을 향해 정조준되었다는 것이 삶의 지독하고도 얄궂은 수수께끼였다.

메러디스(에릭의 아내)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워렌(에릭의 형)은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 매번 거짓말을 하는 사기꾼은 ‘사람’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그의 이야기를 통해 새삼 깨닫는다.






거의 매일 이 물음에 눌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스스로에게 내 삶이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라는 질문들을 꽤 자주 던진다.

‘언제든지 이렇게’ 돼버릴 수 있는 것이 인생이고, ‘소중한 것에 대한 강한 애착과 희망’ 대가가 꼭 좋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또 던진다.


에릭이 바랐던 것처럼 '반듯하게 줄이 맞고, (견고하고 고집스러운 재료들로) 끝끝내 유지될 수 있는 상태'는 이 삶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하루의 다음 날에는 얼마든지 정상적이지 않은 하루가 연결될 수 있고, 삶의 수레바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회전한다.


그리고 그 회전 속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고 내가 멈췄던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말고는 없다. 이미 알았던 사실이지만 에릭의 서사를 통해 다시금 환기한다.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 외에 나 스스로를 지혜롭게 할 방법은 없다고 말이다.





에릭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낙엽은 왜 ‘붉어지고’ 난 뒤에 ‘떨어지는’ 건지 줄곧 다.



낙엽이 떨어지기 직전에 '붉어진다'는 것,
낙엽이 붉어지면 곧 '떨어진다'는 것.



그토록 찾아 헤맸던 인생의 진실과 삶에 대한 지혜는 ‘붉은 낙엽’이란 존재로 이미 다 설명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김없이 가을이 왔고, 곧 내 시간과 내 거리에 붉은 낙엽이 떨어질 때가 왔다. 나는 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 스스로를 지혜롭게 하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낙엽이 붉어지고 떨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어쩌면 딜런 토머스의 시가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죽음이 있은 뒤, 또 다른 죽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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