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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Mar 14. 2020

투투투, 리코더 시험



(아직 보진 못했지만) 영화 벌새로 화제가 된 김보 감독의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래 저때 나도 참 그랬었지 피식피식 거리다가 종국에 한 방을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그런 영화였다.

 영화의 주요한 서사는 주인공인 9살 은희가 리코더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은희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음악 시간, 준비물인 리코더를 안 가져와서 은희가 혼자 손을 들고 벌을 서는 장면부터 나는 이 영화를 놓을 수가 없었다.



 (영화에서도 드러나지만) 엄밀히 따지면 준비물을 못 챙겨 온 당사자가 제일 속상할 일인데 왜 저 시절에는 저런 일로 죄인처럼 벌까지 받았나 싶다. 어쩌다 깜빡하고 리코더를 가져오지 못한 날은 앞과 뒤 옆에 앉은 반 친구들이 연습하는 것을 즐겁게 봤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물론 들고 있던 두 손은 내리고 말이다. 나 역시 혼나던 시절에 학교에 다녔던 한 사람으로서 그날그날의 준비물을 챙겨가지 않거나, 숙제를 안 해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바들바들거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저런 경험이 사는데 얼마나 좋은 습관을 형성하게 했는지는 아직까지 파악을 하지 못했다. 다만 어떤 규율에 대해 (초장부터) 엄격하게 적응해나갔던 과정은 나에게 불필요한 마음의 구김살을 만든 건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내가 집단과 달리 행동했을 때 그것을 지나치게 죄악시하는 마음이라든가, 집단과 다른 누군가를 봤을 때 부정적인 프레임부터 씌울 가능성이 큰 좁디좁은 시선 같은 것들이 있다.







 영화는 쉴 새 없이 나의 그때 그 시절을 건들고 또 건드렸다. 9살 은희는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한창 고픈 나이다. 학교 끝나고 방앗간을 하시는 아빠의 일터로 뛰어가 100점 맞은 미술 시험지를 내밀고, 아빠의 칭찬을 기다리는 은희의 사랑스러운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아빠의 반응은 생판 남인 내가 봐도 화가 날 정도로 싱겁기 짝이 없어 잠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시절, 아빠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시고 엄마와 단둘이 영세한 사업을 시작하셨다. 은희가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아빠의 방앗간 가게를 뛰어갔던 것처럼, 나도 동그라미 그득한 시험지를 받은 날에는 꼭 엄마 아빠가 일하는 가게로 뛰어가 엄마 아빠를 크게 불렀다. 감사하게도 우리 엄마 아빠는 영화 속 은희 아빠와 달리 내가 이 세상 최고인양 칭찬을 해주셨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동생집에 놀러 갔을 때 첫 돌이 막 지난 조카가 갑자기 방으로 뛰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었던 장면 또한 겹쳐졌다. 도무지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그림이었는데, 내게 그것을 내보이고 으쓱하며 뿌듯해하던 조카의 모습이 정말 귀여웠었다. 나는 그때 조카에게 상당히 오버스러운 칭찬을 해주었다.(조카가 말을 하는 이후부터는, 조카의 그림에 칸딘스키적인 느낌이 있다는 조카도 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칭찬을 하기도 한다)

 그때 조카의 행동을 보고 타인의 '칭찬'과 '인정'이란 인간 보편의 욕구이자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의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도 은희는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조심스레 오빠가 썼던 낡은 리코더 말고 새 리코더를 사면 안 되냐고 아빠에게 묻는다. (칭찬받을 일을 하나 들고 와서 조심스레 소원을 말하는 그 시도 또한 사랑스럽다) 그렇지만 아빠는 바쁘다며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 풀이 확 죽어버린 은희에게 아빠는 집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사 먹으라며 (새 리코더 대신) 천 원 한 장을 쥐어준다. 그리고 은희는 아빠가 준 천 원 한 장에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씨익 미소 짓고 신나게  방앗간을 뛰어 나간다.
 김보라 감독이 아이다움의 정서를 이런 시퀀스 안에 녹여내 준 연출이 참 좋았다. 아침에 빵집 앞을 지나갈 때 맡는 빵 냄새 같이 마냥 기분 좋고 따뜻한 장면이었다.




 결국 은희는 새 리코더가 아닌 오빠가 쓰던 헌 리코더로 열심히 연습해서 리코더 시험을 치른다. 그 리코더 시험이 대체 뭐라고 최선을 다하는 은희의 모습을 보면서 내 어떤 시절을 또 떠올다. 무언가를 탓하는 것 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나만의 시험에 열중했던 시절이 내게도 분명 있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소중하고 행복했던 기억이다.

 요즘의 나는 내가 가진 장비부터 탓하고, 내게 주어진 조건에 풀이 죽느라 수많은 리코더 시험을 너무 쉽게 보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진 않았나 싶다.





은희의 떨림, 은희의 순수, 은희의 노력, 은희의 정성,

은희의 슬픔, 은희의 약함, 은희의 최선 이 모든 것을 알고 들어서인가.
 
 참고로 영화 마지막에 나온 은희의 리코더 연주는 말할 수 없는 울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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