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아침, 회사만 출근하면 무너져가는 내 정신 상태를 확인이라도 하듯 최대리가 회사 메신저로 말을 건다.
"하이"
저번 주에는 그런 최대리에게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내놓은 답은 이것이었다.
"나, 주변 정리를 시작했어"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회사를 떠나는 인물이 항상 박스 하나를 들고 사무실을 걸어 나온다. 몇 년의 회사생활이 박스 하나로 정리되는 허탈하고 전형적인 그 장면에 나를 대입시켜 보았다. 그 박스조차 내겐 너무 큰 것 같아 나는 회사에서 제작한 쇼핑백 하나만 들고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그것마저 안 들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정리도 잘 못하면서 자료 욕심은 하늘을 찌르는 나이기에, 언제나 내 책상과 캐비닛 주변은 업무 관련 도서와 출력물이 넘쳐난다. 쇼핑백 하나로는 가당치도 않을 양이지만, 최대리에게 선전 포고한 이후부터 진짜 조금씩 내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
출근하면 괴로워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틈만 나면 뭉개려 드는 내 게으름에 대한 경고 혹은 자각.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스스로에게 환기시키려는 나만의 의식.
내 마음과 내 말과 내 행동이 너무 따로 노는 것 같아, 입은 잠시 다물고 몸을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 출근날에는, 여기서의 온갖 구질구질함은 깨끗하게 잊고 세상 산뜻하게 나가고 싶다. 퇴사 기념으로 회사 굿즈 하나 챙겨간다 하는 맘으로 내 최종 짐은 꼭 회사 쇼핑백 하나였음 좋겠다.
퇴사 날 들고 갈 짐을 상상할 정도로 하루하루 패색 짙은 맘으로 출근하던 어느 아침이었다. 친한 대학 동문에게서 오랜만에 카톡이 왔다. 서로 안부인사를 주고받고 , 자연스럽게 직장에서의 안위를 물어보게 되었다. 나는 사기업에서의 근무 경험이 일절 없기에 그곳은 아무래도 이곳과는 다르겠지 하는 기대와 호기심이 큰 편이다. 게다가 언니가 일하는 곳은 게임을 전혀 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나조차 아는 택진이 형 회사다. 안 그래도 매출실적이 좋았던 회사가 이번에 코로나로 인한 언택트의 바람을 타고 실적이 껑충 뛰었다는 신문 기사마저 보았던 터라 이런 나와 언니의 마음 상태는 상당히 다를 테지 하는 마음으로 내가 먼저 회사 얘기를 꺼내었다.
그래서 언니에게 '전도유망한 회사를 다니는...'으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곧 죽어도 저 전도유망이라는 네 글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하철 한 역에서 다음 역으로 옮겨가는 시간 동안 생각이 날듯 말듯 계속 그 자리였다. 머리를 쥐어짠 끝에 간신히 네 글자를 생각해냈는데, 뭔가 느낌적으로 탁 와 닿지 않고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재확인차 검색창에 네 글자를 쳤더니 유도계 전망과 관련한 글들이 올라왔다.
웬 유도계 전망?
아무래도 이상해 내가 쓴 네 글자를 다시 봤더니 유도 전망이었다. 엄마가 고유명사를 틀리게 말하거나, 단어를 엉뚱하게 말할 때마다 내가 고쳐주면서 한 마디씩 하면 엄마는 너도 내 나이 돼보라고 하셨었다. 옆에서 모녀의 대화를 듣고 계신 아빠는 우리 나이에 여러 글자 중 한 두 글자만 맞게 말하면 그건 맞는 거라고 하셨다. 그게 뭐야 하면서 낄낄 웃었던 나는 삼십 대 젊음의 패기로 네 글자 모두 맞췄지만 내 멋대로의 배열로 아예 다른 말을 할 뻔했다.
엄살도 아니고 괜한 과장도 아니라 요즘 말을 할 때마다 정말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 늘 쓰는 말만 써서인 걸까. 일의 전문성도 딱히 없는데 참 다방면으로 바보 되는 기분이 든다.
퇴근하면 읽으려고 회사 쇼핑백에 오늘 공부할 자료들을 잔뜩 담았다. 이 바쁜 와중에 모국어도 다시 공부해야 하고, 떠나기 전 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