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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19. 2023

나 프락치였네


 옷장이나 책장을 정리할 때 나는 나의 지난 선택과 취향에 대한 회한에 잠기곤 한다. 주로 옷을 볼 때는 아, 이런 걸 예쁘다고 샀었네? 내지는 이 옷이 나한테 가당키나 했었니? 의 두 종류 후회라면 책의 경우엔 책제목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

 옷과 달리 책장에서 책을 아웃시키는 건 극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책 제목에서 나의 지난 욕망을 대놓고 풍기는 자기 계발서의 경우엔 망설임 없이 정리 대상으로 삼는 편이다.


 물론 책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 당시 나는 책을 통해 얻었던 인사이트에 분명 감탄했을 것이며,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책을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이제는 마주하기조차 버겁지만) 아마 당시에는 노골적인 책 제목에 이끌려 책을 샀을 가능성도 아주 크다. 다만 이제 나의 욕망이 변했고, 결코 일반화시킬 수 없는 개인적 경험이 덧대어져 책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품게 된 것뿐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뭐 그런 거랄까.


 이번에 내가 정리한 책은 신현만의, '회사가 붙잡는 사람들의 1% 비밀'이란 책이다. 2009년도에 출판된 책인걸 보니, 아마도 2010년에 입사하고 나서 사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에, 회사가 붙잡는이라니, 그것도 1%의 비밀이라니... 잠시 눈을 감고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렸을 그때의 나를 떠올려본다. 난 다 잘할 거야라는 의욕 충만한 이글거림, 패기와 호기로 뒤범벅된 28살 신입사원의 뜨거움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다. 지금의 나는 그 모든 것이 식을 대로 식어 근처에 물만 갖다 대도 고드름이 생길 지경인데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나는 지금과는 정말 다른 모습이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그냥은 보낼 수 없어 빠른 속도로 책을 훑으며 (써먹을 생각도 없고, 써먹을 수도 없는) 몇몇 정보들은 따로 정리를 해두었다. 그리고 41살 오늘의 내가 꽂힌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미국에서 성공한 케이블 TV사장으로 꼽히는 밥 퍼보드는 자신의 책에서 40대를 인생의 전반전을 끝낸 '하프타임'이라고 해석했다. "하프타임에 어떤 기획을 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후반부는 완전히 다른 시나리오를 만들게 된다." 그는 제2의 전성기를 위해 새롭게 출발하라고 조언한다.


 제2의 전성기가 웬 말이냐 인생에 '전성기'자체가 없었는데라고 피식 넘겨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제1의 전성기가 없어서인지 읽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지금의 내 시기가 하프타임이란 말도 맘에 들었다.

 후반전 경기를 정말 다르게 풀기 위해서 나는 지금 물을 마시고, 쥐가 난 근육을 풀고 있으며, (내 멋대로 정한 나만의 인생) 감독과 코치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 상대의 반칙, 편파 판정, 나의 실책과 자책골로 인해 뛰는 내내 울었던 전반의 플레이와 점수는 이제 그만 안녕, 전혀 다른 분위기의 후반을 준비하는 그야말로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이 책을 다시 보기 전부터, 과거의 욕망을 드러내는 책을 정리하듯 직장 생활로 인해 생겨버린 정체성과 세계관을 과거로 묻어버리려는 계획을 했었다. 확실하게 촥 한 번 털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언급하지도, 들춰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맞지 않은 회사로 인해 살이 들고 부정한 것이 찾아와 끝내 병에 걸린 나를 위한 셀프 제의, 자가 푸닥거리라고 보면 맞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회사원으로서의 내 정체성이 (회사가 붙잡을 리 없는) 프락치이고, 그 세계관이 99% 안 비밀이라는 것이 웃프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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