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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20. 2023

프락치를 위한 푸닥거리의 서막


 나의 진짜 생각들이 자꾸만 꽁꽁 숨으려 들 때, 그것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외부의 질문에 내 답변이 어떤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몇 주 전에 회사가 맡긴 용역업체에서 회사 내부 만족도 설문 조사를 위해 전 직원에게 카톡을 보낸 적이 있었다. 문항이 무려 100개 정도 되는 그야말로 질문 지옥의 설문조사였는데, 나는 그 메시지를 받자마자 아주 신속하게 성심성의껏 전부 대답해 주었다. 입사하고 나서 회사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당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순도 100%로 솔직하게 대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좋게 좋게 대답한다고 해서 나한테 이로울 건 단 하나도 없었건만) 행여 솔직하게 썼다가 색출당할까 봐 두려웠고, 안 그래도 늦은 승진 이것으로 더 피를 보는 건 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걱정 때문에 늘 거짓부렁의 대답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여곡절 끝에 승진을 하기도 했고, 산전수전 다 겪은 마당에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는 나는 (구구절절 쓸 수 있는데 객관식인 게 오히려 아쉽다는 자세로) 냉정한 점수를 휘갈겨주었다.






 설문을 마치고 창을 닫으며 확실히 깨달은 건 회사에 대한 나의 생각이 이 정도였구나... 하는 헛헛함이었다. 어렴풋이 각은 잡고 있었지만 조직에 대한 소속감, 조직원으로서의 자부심, 회사 시스템과 동료(특히 상사)에 대한 신뢰가 그야말로 단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각 질문에 대한 답을 누를 때 단 한 차례도 망설이지 않는 나를 보며, 내 생각이 이 정도로 단호하고 확고했구나 하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본전 심리와 일말의 기대로 이런 걸까 저런 걸까 하며 갈팡질팡하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아마 그때, 13년 차 회사원으로서의 나의 정체성과 그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영혼 없이 회사 다니라는 충고를 그렇게 듣기 싫어했으면서 그 누구보다 무섭게 영혼을 분리시킨 직장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7월이 되면 입사 12년 만에 승진한 지 어언 1년이 된다. 1년이 돼 가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들이 있다. 회사는 직급이 다니까 당연한 거지만 승진을 하고 얼마 안 돼서 어 이제 너도 우리 쪽이구나, 책임자가 되면 말이야 하는 식으로 같은 편인양 묶어대는 몇몇 상사가 있었다. 어머 나도 바닥 탈출, 드디어 일정 궤도에 올랐구나 하는 안도감보다 본인들 입으로 자기 자리를 그런 식으로 추켜 세우는 그 모습이 보기 역겨웠고, 나도 나중에 저럴라나 하는 경계심이 들었다.






 프락치는 러시아어로 특수한 사명을 띠고 어떤 조직체나 분야에 들어가서 본래의 신분을 속이고 몰래 활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내게 있어 특수한 사명이란 먹고사니즘, 애초에 속일 만한 본래의 신분 따위는 없었다. 어떤 조직체에 들어와 13년 굴러먹다가 '본래의 신분'을 자각하게 되었고 그 본래의 신분을 멋있게 회복하기 위해 몸은 아직 어떤 조직에 숨기고 사는 후천적 프락치. 이바로 오늘의 내 정체성이다. (프락치와 비슷하게 스파이와 간첩이란 말도 있지만 미디어의 영향인 건지 스파이는 괜히 세련돼 보이고, 간첩은 왠지 신념 있어 보인다. 고로 어감은 세지만 그나마 고정된 이미지가 흐릿한 프락치로 표현하기로 한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장장 12년을 제시된 규칙과 시스템을 잘 따랐던 모범생 DNA탓이었을까,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발버둥 치다 굳이 여기서도 12년을 채우고도 1년이 흘렀다.

 

미련 없는 정리를 위한 푸닥거리의 서막, 이제부터 열어젖히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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