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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May 02. 2019

낭만이 흥건했던 삼화고속버스


 

 영화 '족구왕'을 보았다. 삼십 대인 나에게는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지난 시절의 이야기지만 많이 공감하면서 재밌게 보았다. 영화의 메시지는 나에게는 물 흘러가듯 참 자연스럽게, 착 달라붙었다. 청춘을 어떻게 보낼지는 다 각자의 선택이지만, 나는 즐기고 놀아야 청춘이라고 생각하고 진짜 나 꿀리는 대로 그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학번도 가늠하기 힘든 선배가 초면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고 하자 주인공인 복학생 만섭은 '저는 연애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 대사 하나에 나도 만섭이처럼 연애만 소망했던 그때를 소환했다. 비록 여중 여고를 졸업한 티를 팍팍 내며 남자 선배와 남자 동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도 잘 몰랐지만 내가 휘젓고 다니는 캠퍼스가 사랑이 넘치는 청춘물의 배경이 되길 바랐었던 그 시절 말이다. 하지만 연애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같이 하는 것이라 나 혼자 마음먹는다고  될 리 없다는 게 내 청춘물 비극의 시작이었다.

 대학교 1학년, 내게도 나만의 청춘물속 상대역이 되었으면 하는 선배가 한 명 있었다.  술  잘 마시고, 노래 잘하고, 잘 생기고 친절한데 마침 여자 친구와 헤어져 남자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 보는 눈은 다 거기서 거기인 건지, (나처럼) 감정을 인정한 자와 인정하지 않은 자를 모두 포함하여 우리 과에서 그 선배를 좋아하는 여학우가 대략 10명이 넘을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다. 이렇게 캐스팅의 난항이 예상되는 가운데에서 나에게는 치명적인 어드밴티지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 여학우들 중에 유일하게 그 선배가 살고 있는 인천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항상 끝까지 남아 있었던 그 선배를 따라 나는 항상 술자리의 마지막을 지켰다. 그 선배와 같이 술을 먹는다는 그 자체도 좋았지만, 끝까지 남아 있으면 선배가 꼭 학교 근처에서 인천까지 가는 삼화고속버스 막차를 타고 집까지 데려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선배에 이어 내가 매번 삼화고속버스 막차를 타고 하교하자 그 모습을 본 다른 선배가 인천 사는 애들은 꼭 집에 일찍 일찍 안 들어가고 삼화고속버스 막차를 타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있다고 놀려댔다. 그 말에 집에서 학교까지 오는데 이래저래 2시간 가까이 걸려서 그냥 집에 가면 왠지 억울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모든 건 그 선배와 집에 같이 가고 싶다는 그 한 가지에서 비롯되었다.

 안 되는 영어로 정직한 발음을 구사하며 안나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주인공 만섭을 보고 있자니,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끝까지 술자리에 남아) 삼화고속버스 막차 타는 거밖에 몰랐던 나의 그때가 겹쳐졌다. 당연히 나도 만섭이처럼 그 선배와의 연애는 실패했다. 경쟁자들 중 유일하게 갖고 있던 어드밴티지 한 번 제대로 못 살려 보고 집에 늦게 가는 주접만 떨다가 끝이 났다. 현실이 영화보다 해피엔딩이라면 이미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없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넌 뭘 믿고 그렇게 낭만이 흥건하냐는 영화 속 노땅 선배의 대사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낭만이라는 것은 그저 바짝 말라있는 것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믿을 것이 단 하나도 없, 낭만이 흥건했던 그 시절. 갑자기 몹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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