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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30. 2019

아버지의 암, 그리고 짜가 어른의 실체


 오늘은 아버지의 생신이라, 온 가족이 모여 집에서 식사를 하고 생일 케이크를 잘랐다. 아버지의 두 번째 암수술 이후, 4번째 맞는 뜻깊은 날이다.

 2015년, 우리 집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동생이 결혼을 했고, 아버지가 식도암 수술을 했다. 아버지의 두 번째 암이었다. 아버지의 암이 처음 발견된 계기는 나의 입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회사에 입사하고 나니, 회사에서 전 직원에게 매년 건강검진을 시켜줬다.

삼십 대인 내가 수차례 건강검진을 받는 동안, 육십 대에 접어드신 부모님이 단 한 번도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회인이 된 기념으로 부모님께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어 부모님 건강검진을 시켜드렸다.

건강검진 결과, 아버지가 위암이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위암은 초기였고 비교적 간단한 수술로 아버지의 암세포가 제거되었다. 그래서일까. 우리 가족은 암을 너무 쉽게 생각했고, 앞으로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어떤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쉽게 제거했어도 암은 암이었기에 아버지는 위암 수술 후에 정기 검진을 받아야 했다. 그때마다 연차를 내고 늘 내가 모시고 갔는데, 그 날따라 유독 검사가 길어졌다.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며 의료진이 내 동의서를 받아갔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이어졌고 아버지가 이번에는 (위암에서 전이된 것이 아닌) 식도암이라는 검사 결과를 듣게 되었다.

식도암 수술의 위험성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본 나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서 신속히 입원 절차를 밟았고, 아버지의 식도암 수술은 무탈하게 진행되었다. 아직도 그때 금요일이 생생히 기억나는 건 집도의로부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주말 동안 입원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퇴원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위암 수술 때처럼 모든 게 다 잘 끝난 것이라고 굳게 믿은 동생과 나는 출근을 했고 퇴원이 예정된 월요일에 어머니 혼자 병원에 가셨다.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던 어머니는 그 날 혼자
돌아오셨다. 급성폐렴으로 아버지가 갑자기 중환자실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중환자실 담당 의사가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까지 했다며 어머니는 계속 울기만 하셨다. 아버지를 퇴원시키러 가셨다가 혼자서 엄청난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심적으로 무너지셨고, 수술 담당 의사와의 면담은 나와 동생이 하게 되었다. 의사의 소견이란, 급성폐렴은 식도암 수술의 후유증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아버지의 현재 상태는 자가 호흡이 불가능한 상태로, 언제 그것이 가능해질지는 알 수 없다는 드라마 대사 같은 것이었다. 면담이 끝나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동생과 내가 한 10분간 잠시 떨어져 있었는데, 다시 만난 우리 남매는 둘 다 시뻘게진 눈을 하고는 서로 울었던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수술이 끝나고 아버지는 거의 두 달 가까이 중환자실에 계셨다. 그 당시에 메르스의 여파로 병원 중환자실 면회는 하루 두 번, 한 환자당 한 명만 허용되었다. 면회라고 해봤자 30분 정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대답 없는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면회 때마다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못 가는 날에는 다른 가족이라도 꼭 가게 했다. 중환자실에 계시니 딸로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도 했지만 한 번이라도 면회를 놓치면 아버지가 영영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시게 될까 봐 거의 병적으로 집착했다. 아버지의 회복에 대한 기다림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돌변하는 날에는 병원 내에 비치된 암 관련 책들과 암을 이겨내신 분들의 수기를 미친 듯이 찾아 읽었다.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시간 동안 아버지의 생신도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오전 면회를 마치고 끼니를 때우려 병원 내 편의점에 군것질거리를 사러 갔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딸기 산도 과자가 눈에 보였다. 평소에 사다 드리면서 단 한 번도 인지한 적 없었는데 과자 상자 겉면에 ‘since1956’라고 씌어 있었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는 아버지와 같은 해에 태어난 과자였다.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제일 먼저 드리려고 하나 샀는데 아버지의 생일날 그 과자를 부여잡고 혼자서 엉엉 울었다.

면회를 가면 항상 아버지의 손을 잡았는데 크고 나서 아버지의 손을 그렇게 오랜 시간 잡아본 것이 처음 같았다. 아버지가 누워 계신지 한 달쯤 되던 날 나는 그 시간에 대해서,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에 대해서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2015년 8월 1일.
한 달째, 기다림을 배우는 중이다.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고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 당연한 지금 이 순간, 나의 안과 밖. 많은 것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아빠는 아파서 주무시고 계시는 동안에도 이렇게 나를 가르치고 또 가르치신다. 서른셋. 짜가 어른의 실체는 아빠의 손을 잠시라도 놓으면 이토록 흔들거리는 그런 것이었구나.



 저 일기를 쓴 이후로 얼마 뒤에 의사에게서 희망의 메시지를 들었다. 약물치료에 아버지가 조금씩 반응을 보이셔서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는 시간을 조금씩 줄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아버지의 호흡이 돌아오면서 수술한 지 두 달이 되었을 때쯤, 마침내 아버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셨다.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서 얼마간은 호흡 불안이 와 다시 중환자실로 돌아가야 할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온 가족이 뜬 눈으로 아버지의 호흡을 확인하면서 아버지가 잘 이겨내시기를 응원했다.
일반 병실에서 회복의 속도가 붙자 가정용 산소호흡기를 동반한 퇴원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집이 주는 편안함 때문인지 퇴원 이후 아버지의 호흡은 비교적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4년이 지난 지금, (상당 부분 절제된 식도로 인해) 식사하실 때 불편하신 것 빼놓고는 아버지의 건강은 많이 좋아지셨다.

수술 이후 지금까지 정기 검진에서 특별한 이상 소견이 없었고, 그 덕에 올해 구정에는 아버지 수술 이후 처음으로 온 가족이 대만 여행도  다녀왔다.



조카가 오늘 아버지께 '편지'라며 준 카드


  4년 전,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카가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아버지와 같이 생일 케이크 촛불도 끄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늘 뭔가 불만인 일상 속에서 오늘만큼은 감사할 일 투성이었다. 생신을 축하드릴 수 있게 해 주신 아버지께도 감사하고, 아버지께 손주라는 큰 행복을 선물해준 동생에게도 고마웠다.

 아버지가 수술했던 병원이 신촌에 있어 2015년 이맘때, 양화대교를 거의 매일 건넜었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안되던 순간순간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으면서  혼자 정말 많이 울었었다.  동생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고,  부모님도 안방에 들어가셨는데 마루에 혼자 앉아  괜히 불러본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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